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20여년간 스포츠 취재기자 생활을 할 때, 경기 전후 선수들의 라커룸(탈의실)에서 즉석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 전 선수들의 컨디션과 각오 등을 듣고, 경기 후에는 승패요인을 간단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공식적인 기자회견이 있었지만 필요한 특정 선수들을 만나는 데는 라커룸이 제격이었다. 굳이 선수들을 불러낼 필요도 없고, 선수는 편하게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취재를 하면서 라커룸에서 건네는 선수들의 사적인 농담, 상대 선수들을 향한 조크 등 다양한 얘기를 들었다.

미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 때문에 ‘라커룸 대화’가 갑작스레 세인들의 큰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트럼프가 음담패설을 하는 동영상을 지난 7일 워싱턴포스트가 폭로한데서 비롯됐다. 2005년 10월 NBC 방송의 연예 프로그램 제작진에 의해 찍힌 동영상에는 촬영장으로 이동하던 버스 안에서 방송 진행자 옷에 달아놓은 마이크가 트럼프의 대화를 녹음한 것이 담겼다. 영상에서 트럼프는 과거 여성에 대해 손으로 더듬고 강제로 키스하려했다는 낯 뜨거운 대화를 미국의 전 대통령 부시의 사촌 동생인 빌리 부시와 주고받았다. 트럼프는 문제가 된 동영상에 대해 “그건 라커룸에서 남자들끼리 한 얘기와 같다. 자랑스럽지 않은 일이지만, 그저 남자들끼리 한 음란한 얘기일 뿐이다”며 사사로운 농담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음담패설을 ‘라커룸 대화’로 치장한 트럼프를 향해 미국 프로선수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트위터 등을 통해 미식축구, 야구 선수들은 “신성한 라커룸을 모독하지 마라”며 트럼프를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미식축구 캔자스시티의 와이드 리시버 크리스 콘리는 “내가 모든 경기의 라커룸에는 있지 않았지만, 평소 존경하고 알고 지내는 대부분의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트럼프와 같이 얘기하지 않는다. 여자들에 관해 말을 하더라도 트럼프처럼 여성들에게 성적인 수모를 줄 정도로 유치하지 않고 점잖게 한다”며 분노했다.

육상과 미식축구 선수출신인 뉴욕타임스의 스포츠기자 빌 페닝턴은 ‘라커룸 대화란 정확하게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라커룸 대화는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트럼프와 같이 돌발적이고 성범죄 혐의를 풍기는 그런 식의 얘기들은 오고가지 않는다고 밝혔다.

트럼프의 ‘라커룸 대화’ 사건은 2차 대선토론 후 한동안 시끄럽다가 일단 수습 국면을 보이고 있으나 운동선수들 입장에서는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 것만은 분명하다. 경기에 진지하게 임하는 선수들의 진정성 있는 모습이 왜곡되고 마치 유치한 성적 농담이나 한가롭게 주고받으며 라커룸에서 희희낙락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양상은 선수들이나 팬들 모두 결코 원하지 않는다.

미국과 한국의 스포츠 문화와 환경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만약 사회적으로 저명인사가 트럼프와 같이 성적인 발언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아마도 보수성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엄중한 사과를 하고 사퇴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동안 라커룸에서 크고 작은 소동이 있었다. 박찬호가 미국 프로야구 LA 다저스에서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두었을 때, 라커룸 ‘양복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팀 선수들은 박찬호의 양복을 찢는 등 통과의례를 다소 유난스럽게 치르면서 벌였는데, 박찬호는 이에 분개하여 라커룸 의자를 던지고 소리를 지르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때 미국 언론은 박찬호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며 그를 비난했으나 한국 언론들은 이를 덮어주며 보호하기도 했다.

지난 2014년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구단은 구단 대표의 지시로 선수들의 일상을 감시하기 위해 라커룸에 폐쇄회로 TV(CCTV)를 설치했다가 선수들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가 나서 조사에 나섰다. 롯데의 라커룸 CCTV 사찰사건은 전 국민적 망신을 당하며 구단이 공식 사과를 하고 사장, 단장, 운영부장이 동반 퇴진하는 홍역을 앓았다.

라커룸은 선수들이 추악한 농담이나 하고 야단법석을 떠는 곳이 아닌, 경기를 앞두고 깊은 토론을 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트럼프는 라커룸을 한갓 성적 농담이나 주고받는 저잣거리쯤으로 생각했다가 뜨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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