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우리나라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 1896년 연례회의에 참석한 선교사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선교기념관에 있는 자료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언더우드 선교사가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는 선교사들의 피와 땀, 눈물이 뿌려지지 않았던들 한국교회가 뿌리를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터이다. 130여년 전 고국을 뒤로하고 수억만리 떨어진 타국, 은둔의 땅 조선에서 하나뿐인 생명을 아낌없이 헌신한 선교사들의 삶과 발자취를 들여다보고자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을이 짙어지는 10월 초, 한국 개신교 선교 유적지이자 대표적인 성지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았다. 양화진(楊花津)은 선교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영원히 잠들어 있는 곳이다. 지금도 해마다 선교사들의 후손과 수많은 교회, 교인들이 참배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 ‘양화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서울 도심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전철 2호선 합정역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왔다. 출구 정면에 양화정 정자와 건강샘약국·서울비전내과의원 간판이 보인다. 그 사잇길로 200여미터 걸어오면 묘원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선교사묘원의 면적은 1만 3224㎡이며,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와 선교기념관, 양화진홀, 양화진 홍보관·봉사관, 양화진성지공원, 야외무대, A~I(9개)지역으로 나뉜 묘역 등으로 조성돼 있다. 안장자 수는 15개국 417명이며, 가족을 포함한 선교사 수는 6개국 145명이다. 외국인 선교 역사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도록 잘 꾸며졌다.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은 추모객이 묘비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양화진 안내 봉사자들의 인도를 받아 홍보관에서 ‘양화진’과 ‘선교사들의 삶’을 다룬 영상(약 28분)을 봤다. 이어 봉사자들이 10~20명으로 조를 나눠 묘역을 둘러보며 영상에서 이야기 못한 선교사들의 삶을 자세히 설명하니 도움이 많이 됐다.

양화진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졌다. 봉사자들에 따르면 양화진은 ‘버들꽃 나루’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나 중국의 사신을 비롯해 많은 풍류객들이 자주 머물던 곳이다. 양화진에 인접한 ‘망원정(望遠亭)’은 세종 임금의 형 효령대군과 성종 임금의 형 월산대군이 별장으로 사용한 수려한 정자도 있었다. 이뿐 아니라 양화진은 큰 선박이 드나들 정도로 수심이 깊어 조선왕조의 통상, 교통, 국방 등의 요충지였다. 그러하기에 외국과의 교류와 무역이 활발했다.

▲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선교사 묘원의 역사적 배경

영국, 미국 등 영어권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이 서구 열강들과 국교를 수립할 무렵인 구한말, 조선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 1884년 9월 주한 미국 공사관 공의 자격으로 입국한 알렌(H. N, Allen) 선교사가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이 일어난 시기에 생명이 위독한 민영익을 살려냈다. 이를 계기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왕실과의 관계가 깊어진 그는 고종을 설득시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현 연세대의대 부속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고, 의료 선교사역에 힘쓴다. 알렌의 뒤를 이어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당시 선교사들은 금교령으로 인해 복음사역이 허락되지 않은 조선사회에서 주로 서구의 의료와 교육, 자선사업 등을 통해 선교사역을 펼쳤다.

광혜원의 최초 원장이었던 알렌에 이어 2대 원장이 된 헤론(John W. Heron) 선교사는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던 중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헤론의 시신을 매장할 묘지를 구하지 못한 동료 선교사들과 유족들은 미국 공사 허드(A. Heard)를 통해 한성에서 가까운 곳으로 매장지를 요구했다.

한성 안에 시신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유족들의 요구에 미국 공사 허드는 1890년 7월 24일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목에게 1884년 조인된 조·영 통상조약을 인용해 남대문 밖 남산 기슭의 땅에 외국인 묘지의 설정을 요청했다. 고종의 허락 하에 양화진이 외국인 매장지로 정해져 1890년 7월 28일에 개설이 허가됐다.

▲ 선교사들이 한글로 번역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사본. ⓒ천지일보(뉴스천지)

◆순교·헌신의 삶 이어가야

선교사들은 세상의 변방이던 ‘Corea’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헌신했다. 어떤 이는 의료 봉사로, 천대받고 헐벗은 아이들과 천민들을 돌보며 교육하고, 또 일본에 의해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도 많은 희생과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선교사묘원에 이름은 남긴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다. 그는 1885년 내한해 우리나라 첫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와 경신학교, 연세대학을 설립했다. 또 평생을 성서번역위원장으로 사역했다. 양화진에는 자신과 아내를 비롯해 모두 7명의 가족이 잠들어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 근대교육과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1885년 조선에 들어온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첫 감리교회인 정도교회를 세웠다. 한글 성경 번역에도 헌신한 그는 성경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선박사고로 순직했다. 양화진에는 그의 기념비가 있으며, 아들 내외와 딸이 묻혀 있다.

▲소다 가이치는 양화진에 안장된 유일한 일본인이다. 개신교 신자인 그는 부인과 함께 한국 고아들을 위해 삶을 바쳤다. 1921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1000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봤다. 그의 공로를 인정한 정부는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헐버트 선교사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는 조선에 관한 글을 써서 외국에 알렸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정부는 1950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헐버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의료 선교사로 남편과 딸을 잃은 고통 속에서도 45년 동안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겼다. 아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요양원을 세워 결핵 환자들을 치료했고,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해 결핵에 대한 계몽운동도 벌였다. 양화진에는 3대에 걸쳐 6명(선교사 4명)의 홀 가족이 합장돼 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회 소속 개척선교사로 한글 성경 번역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1895년 성경번역위원으로 선임된 후 43년 동안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헌신했다. 특히 구약 번역의 주역이었다. 양화진에는 한 살이 되기 전 죽은 맏아들과 아버지를 이어 선교사로 사역한 둘째 아들이 묻혔다. ▲베델은 선교사가 아닌 언론인이었다. 그는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억눌린 한국인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베델은 민족 지사들을 신문사의 주간으로 영입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드높이는 글들을 실었다. 1909년 37세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안장됐다.

이 밖에 수많은 선교사들도 헌신과 희생으로 한국 사람들을 보듬고 지켰다. 그들이 남긴 순교의 삶은 오늘날 한국 복음의 놀라운 역사를 써 가는 소중한 밑거름이다.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들의 정신,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걷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 외국인선교사 묘역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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