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잇는 다리 '배다리'에서 바라본 전경.(사진=김빛이나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세미원-배다리-두물머리-황순원 소나기 마을
한반도 정중앙 위치한 버드나무‘楊’ 평평할‘平’

[천지일보=이지영 기자] 가을엔 양평이었다. 기자가 양평을 찾은 10월 첫날, 다른 지역에는 비가 꽤 쏟아졌다지만 아직 이곳은 여름과 가을의 중간에 선 듯 비구름이 그렁거리다 해가 들었다 오락가락 하늘은 춤을 췄다.

버드나무 양(楊)에 평평할 평(平). 한반도 정중앙에 위치한 양평군은 서울시 1.4배 면적의 너른 터를 가지고 있다. 평평한 대지에 햇볕이 고루 쏟아져서인지, 양평은 산뜻하고 청량감 있는 가을과 무척 잘 어울린다.

가을의 기대감을 따라 찾아온 양평. 원래 황포돛단배의 두물머리가 유명하지만 기자 일행은 살짝 비껴 수련 꽃이 한창인 세미원과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을 찾았다.

▲ 세미원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인 '두물머리'와 연결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개천절을 낀 황금연휴라 토요일 오전부터 도로에 차가 많다. 차는 막혀도 팔당호에 뜬 구름을 따라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길을 잘 모르는 기자는 운전자가 가는대로 창밖의 경치를 즐기다 어느 구간부터 무성하게 펼쳐지는 연잎에 시선이 갔다.

언뜻 배추밭 같아도 보이는 연잎 무리들은 가깝고 먼 산등성이들과 함께 꽤 조화를 이뤄 보였다. 연잎 무리 끝에 깃발을 펄럭이는 ‘배다리’가 보일 쯤 기자 일행은 세미원에 도착했다.

◆한강의 시작, 두물머리 정화하는 세미원

세미원이 조성된 배경은 두물머리와 연결점이 있다. 세미원은 한강의 시작점인 두물머리를 정화한다는 취지로 세워진 자연정화공원이기 때문이다. 면적 18만㎡ 규모에 연못 6개를 설치해 연꽃과 수련·창포 등을 심었다. 이렇게 수생식물이 사는 6개의 연못을 거친 한강물은 중금속과 부유물이 거의 제거돼 팔당댐으로 흘러들어간다. 여러모로 쓸모 있는 공간이다.

찾아간 이날 세미원의 연잎은 초록에 지쳐 갈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연잎만 무성한 지금보다 연꽃이 한창인 6~8월에 오면 볼거리가 많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엄청나게 더웠을 여름 더위가 같이 떠올라 오싹하다.

▲ 세미원과 배다리 사이에 드넓은 연잎밭이 펼쳐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뜰에 걸어놓은 액자를 보니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세미원(洗美苑)에 대한 글귀가 있다. 과연 세미원은 물과 꽃의 정원이다. 백련지, 홍련지, 빅토리아 연못, 사랑의 연못 등에는 연꽃과 수련 그리고 푸른 연잎과 여러 수생식물로 가득했다.

연꽃이 진 가을에는 수련문화제를 열어 관람객의 발길을 유혹한다. 기자 일행은 세미원의 코스를 따라 사진에 담을 수련을 찾아 헤맸다. 이날 가능한 이른 오전 시간을 택해 바삐 움직인 것도 이른 아침 청초한 모습의 수련을 찍기 위해서였으니까.

매표소에서 불이문을 통해 정원에 들어서니 아담하게 흐르는 개울물에 반듯한 돌길이 놓였다. 시원한 개울물이 내딛는 발 아래서 느껴져 올라온다. 느긋한 발걸음으로 한반도 지도 모양의 연못 ‘국사원’을 지나니 뚜껑 사이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장독 분수대’가 보인다. 일심교 양 옆으로는 연잎만 남은 홍련지와 백련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이쯤 되니 걱정이다. 수련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순간, 꽃내음이 나는 듯한 빅토리아 연못가가 보인다.

▲ 왼쪽부터 세미원의 불이문과 돌다리, 장독분수대. ⓒ천지일보(뉴스천지)

◆세미원의 간판 ‘물의 요정’ 빅토리아 수련

개체수가 연꽃보다 작은 세미원의 수련은 이에 질세라 화려한 꽃 매무새를 자랑했다. 세미원의 간판 역할을 하고 있는 수련은 ‘빅토리아’다. 아쉽게도 이날 빅토리아를 보진 못했지만, 잎이 최고 3m까지 자란다는 그 잎은 한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가 그 위에 타도 될 만큼 엄청나게 큰데, 같은 연못가의 개구리밥과 비교하니 웃음이 났다.

빅토리아 수련은 첫째 날 흰색에서 둘째 날 분홍색으로 변신하고 셋째 날 밤엔 붉은 색으로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10월 말까지 수련문화제 야간개장 기간인데 이를 보지 못함이 아쉽다.

▲ 세미원의 수련. ⓒ천지일보(뉴스천지)

열대수련연못에 들어서니 많은 종류의 수련이 일행을 반겼다. 기대했던 청초함보다, 뾰족뾰족 날이 선 꽃잎 끝에서 오히려 건강미가 느껴진다. 매력적이고 화사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수련을 보고 연꽃이라고 했다. 하긴, 나도 모르고 봤다면 그렇게 널 오해했을테니 비웃지는 말자. 수련의 꽃말은 ‘청순한 마음’이다. 꽃이 땅도 아닌 물 위에서 저렇게 가만가만 피어있는 걸 보니 문득 신기하다. 그래서 수련을 물의 요정이라고 하는가보다. 냉정하게 말해서 물에서 천하일색이겠지. 땅에는 서로 요정이라 할 꽃들이 많으니 말이다.

요정에게 홀려 너무 많은 시간을 뺏겨선 안 된다. 생각보다 넓은 세미원을 샅샅이 다 살펴보기는 어려워 보여 일행은 세계수련관은 과감히 생략하고 두물머리로 향했다.

▲ 세미원의 수련 연못 정원. ⓒ천지일보(뉴스천지)

◆‘세한도’ 사연 담은 ‘약속의 정원’ 세한정

그런데 저기쯤 수묵화에나 등장할 법한 세 그루의 소나무가 심긴 정원이 보인다. 서예 사상 최고의 경지에 이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대한 사연이 담긴 ‘세한정’이었다. 이곳을 ‘약속의 정원’이라 부르는 이유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생활 당시 헌신적으로 스승을 살핀 제자 ‘이상적’과의 아름다운 사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약속의 정원 세한정. ⓒ천지일보(뉴스천지)

귀양살이에 책을 구할 수 없었던 추사는 글 읽기에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꼈다고 한다. 제자 이상적은 먼 타국에 가서도 스승에게 책 보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스승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야 했던 제주도 뱃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국보 ‘세한도’에는 그런 제자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고 하는데, 그 배경설명에서 추사의 고독한 마음이 함께 느껴져 가슴이 먹먹했다.

드디어 배다리에 들어섰다.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잇는 다리다. 정식명칭은 ‘열수주교(洌水舟橋)’인데 맑은 물에 배를 띄운 다리라는 뜻 그대로 나룻배 50척 위에 얹어 만든 다리다. 정조시대 정약용 선생이 설계한 한강의 배다리를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다리 위에서 보는 풍경이 기가 막히다. 초록 연잎들이 물위에 우산을 받치듯 우수수 마중 나와 있고, 산 위로 흐르는 구름 물결 끝으로 두물머리의 삼각형 앵글이 눈에 쏙 들어온다.

배다리를 건너 두물머리로 이동하는 구간. 이쯤 구경을 오면 다들 배가 고픈 걸까. 연잎이 재료로 들어갔다는 핫도그 가게 앞이 문전성시다. 기자 일행도 설탕, 케첩, 머스터드 소스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묻혀서 주문했다. 먹다 보니 설탕을 조금 더 묻힐 걸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맛은 그럭저럭 좋다.

그리고 당도한 두물머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흘러 비로소 만나는 지점인 두물머리는 이 고장의 명소가 될 만하다. 새벽 물안개가 없어도 강물은 고요하기만 하다. 400년 된 느티나무 외엔 별다르게 화려할 것도 없지만, 이 앞에 펼쳐진 짙은 강물과 좌우로 뻗은 산, 그 위의 하늘과 구름은 오래오래 머물고 싶게 하는 마력이 있다. 오천만 동포의 한강 상수원 앞에서 기자는 이런 저런 상념에 사로잡혔다.

▲ 두물머리 앞에 펼쳐진 전경을 관람객이 바라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양평에서 만난 소나기 마을

황순원의 소나기 마을을 찾게 된 건 죽거든 분홍색 스웨터를 그대로 입혀 묻어달라던 ‘여간 잔망스럽지 않은’ 소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엔 소설 속 소년소녀의 사랑이 그렇게나 ‘서정적’이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아마도 그땐 나도 소녀였기 때문이겠지.

소설 소나기의 계절적 배경은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갈꽃’이란 표현처럼 가을이다. 소나기는 여름에 내리기 마련이라 소나기 소설 속 계절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여름’이라고 오답을 냈다. 내친김에 한 가지 질문을 더 하자면, 황순원 작가의 고향은 평안남도인데 양평에 황순원 문학테마마을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소나기’ 작품 배경이 ‘양평’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소설 말미에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라고 등장한다. 이 구절 하나로 세워진 곳이라 하니 ‘소나기’가 갖는 상징성이 자못 크게 느껴진다.

황순원 문학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기엔 지면의 분량이 모자란다. 다만 이 문학관이 황순원 작가가 일제 말 우리말을 지키려는 비장한 각오로 글쓰기를 했다는 점과 순수와 절제의 미학으로 표현되는 선생의 문학을 소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겠다.

소나기 마을 안내도를 보면 양평의 땅 씀씀이가 참 좋다 느껴진다. 수숫단 오솔길부터 들꽃마을을 거쳐 너와 나만의 길에 이르기까지 소설 속 장소를 재현한 제3코스를 이용해 둘러볼 경우 50여분의 시간이 걸리니 말이다.

늦은 오후 고즈넉한 가을 숲길을 걸으며 다시 잔망스런 소녀를 떠올려본다.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묶음 같다.” 세미원의 꽃도 소녀의 모습도 이 길을 걷고 있는 내 마음도 다 꽃 범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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