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수도인 한양 주변에 도성을 쌓았다. 그리고 성 안에 드나들 수 있는 동서남북에 문을 만든다. 그러면서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문 이름에 담아 놓는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인(仁)’, 서쪽 돈의문(敦義門)은 ‘의(義)’, 남쪽 숭례문(崇禮門)은 ‘례(禮)’다. 그리고 북쪽 숙정문(肅靖門, 전 숙청문)은 ‘지’를 상징한다. 다만, 당시 백성이 지혜로워지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워진다며 ‘지(智)’자 대신에 ‘청(淸)’자를 넣었다고 한다. 선조들의 삶을 담고 있는 4대문, 역사 속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보자.

 

▲ 자연 품에 안긴 숙정문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눈앞에 펼쳐진 비경에 숨이 멎었다. 푸른 잎에 숨어 수줍게 고개만 ‘빼꼼’ 내미는 울긋불긋한 나뭇잎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제멋대로 자란 멋스러운 소나무들. 그 안에서 뒤엉켜 여유롭게 노니는 새들. 북한산 동쪽 삼청동과 성북동이 만나는 계곡 끝자락은 한 폭의 산수화 같았다. 과연 이 안에 ‘숙정문(肅靖門)’이 있을까 싶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몸을 싣고 산을 더 오르자, 이내 성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주한 숙정문. 자연의 품에 안긴 숙정문의 아름다움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옛날, 이곳 북악산 자락에서 풍류를 즐기던 선조들. 왜 북악산 자락을 택했는지 이곳에 와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 숙정문으로 가는 나무 계단 ⓒ천지일보(뉴스천지)

◆험준한 산악지역 위치

숙정문은 1396년(태조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다.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유일하게 산자락 중턱에 위치한 숙정문은 큰길에 세워진 다른 성문과는 전혀 다른 운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 13년(1413) 6월 풍수학자 최양선은 이런 상소를 올린다.

“숙정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다리와 같으니 길을 열지 말아서 지맥을 온전하게 하소서.”

이후 숙정문은 닫히고,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지했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달리 사람의 출입이 없었고, 험준한 산악지역에 있어 성문의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

다만 가뭄이 심할 때는 숙정문을 열었다. 태종 16년(1416)에는 기우절목(祈雨節目, 기우제 시행규칙)을 만들어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다. 이는 음양오행설에 따른 것으로 북쪽은 ‘음(陰)’ 또는 ‘수(水)’, 남쪽은 ‘양(陽)’ 또는 ‘화(火)’에 해당돼 가뭄이 들 때는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북돋운 것이다. 장마 때면 그 반대였다.

숙정문에 대한 설은 이것만이 아니다. 조선 후기 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숙정문에 대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양주 북한산으로 통하는 숙정문 역시 지금 폐문하고 쓰지 않으니 언제부터 막았는지 알 수 없으나 개통하던 당시, 한양성의 남녀 사이에 음란한 풍조가 자꾸 일어나므로 닫아버렸다고 한다.’

도성 안 여자들의 풍속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숙정문을 닫아야 한다는 게 옛 선비들의 믿음이었던 모양이다.

▲ 숙정문 위쪽 성벽. ⓒ천지일보(뉴스천지)

군인들의 출입문제로 잠시 문이 열렸던 적도 있다. 세종실록(1422)에 따르면 ‘도성을 수축하고, 숙청문(현 숙정문)과 창의문 두 문을 열어 군인들의 출입하는 길을 통하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연산군 10년(1504)에는 문의 위치가 약간 동쪽으로 옮겨졌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래나 저래나 숙정문은 본래 태생이 산속에 있다 보니, 이런저런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수려한 경치로 양갓집 규수와 아낙네들의 놀이 장소로 꼽히기도 했다.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가 연중행사와 풍속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해의 재액(災厄)을 면할 수 있다”는 풍속이 전해지고 있다.

▲ 숙정문 성벽서 바라본 도심.ⓒ천지일보(뉴스천지)

◆2006년 일반에 개방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이 월단만 남아있었다.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하지만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그러다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했다. 1963년 1월 21일에는 서울성곽에 포함돼 사적 제10호로 지정됐다.

문의 역할을 못한 사연은 많지만, 오늘날 숙정문은 다른 성문과 달리 제 빛깔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는 못했지만, 묵묵히 한양을 지켜왔을 숙정문.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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