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조선 말기 때 서구 문화가 들어오면서 우리 전통 생활양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식 의례가 행해지면서 결혼이나 장례 문화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1888년 정동교회에서 아펜젤러의 주례 아래 진행된 신자 한아무개씨와 과부 박씨의 결혼식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결혼식으로 알려져 있다. 2년 후에는 박아무개씨와 강아무개씨가 신식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사람들 눈이 무서워 의복은 전통방식을 따랐다. 다시 2년 후 배재학당 남학생 신랑은 프록코트를 입고 신부 황 씨는 면사포를 쓰고 예물까지 교환하는 등 제대로 된 신식 결혼식을 선보였다. 예배당 결혼이라고 불렸던 이 신식 결혼식은 교회의 증가와 함께 더욱 확산됐다. 

당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복수결혼(福手結婚)이란 것도 유행했다. 복수(福手)란 신부의 쪽과 신랑의 상투를 틀어주는 사람을 말한다. 복수결혼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랑 신부 머리만 올려주고 혼인을 선포하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물 한 그릇 떠놓고 서로 절을 올리고 혼인을 약속하는 작수성례(酌水成禮)에 간단한 서양의 기독교식 절차를 덧붙인 것이다. 

당시 양반이나 돈 있는 집안에서 하던 유교식 전통 혼인 풍습은 절차가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때문에 서민들은 언감생심 흉내조차 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복수결혼은 ‘서양식’ 결혼이라는 점과 함께 비용이 적게 되는 경제적인 혼인으로 크게 인기를 모았다. 처음에는 가난한 집 사람들이 주로 하였지만 나중에는 좀 살만한 집안까지 확산됐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신식 결혼식이 더욱 성행했다. 일제가 ‘의례준칙’이란 걸 내세워 전통 혼례를 금지한 탓도 컸다. 1920년대 이후 지금과 같은 결혼 전문예식장이 생겨나면서 종교적인 이유로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게 됐다. 당시에 처음 생겨난 백화점도 신식 결혼식장으로 인기를 모았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시작된 신식 결혼을 하되 종교적인 정신과 상관없이 그 형식만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집안의 권세와 부를 자랑하기 위한 전통혼례의 폐해는 여전했다. 1926년 5월 동아일보는 “이제 우리 조선서 현재 고유한 혼상제도의 예폐를 봅시다. 그 얼마나 무용한 노력과 귀중한 금전과 시간을 공연히 허비하는가. 이것이 원래 중국문화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타국 문화를 수입한 그 시대와 그 국가에는 태평하였고 백성은 안정하야 의식이 족할 그때에 상당히 숭배할 도덕이나 현세는 다만 귀중한 금전과 시간을 허비할 뿐이라”라며 결혼과 장례문화를 개선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1960년대 말 정부는 ‘가정의례준칙’을 선포하고, 결혼이나 장례, 제례, 회갑연을 할 때 청첩장 발송이나 화환 진열, 답례품 증정, 술과 음식물 접대 등의 구체적인 금지조항을 두었다. 하지만 법은 유명무실했고, ‘뼈대 없는’ 집안에서도 허례허식에 집착하면서 그 문화가 아직까지 내려오고 있다. 

얼마 전 새로 도입된 법 때문에 결혼식이나 상가의 풍경도 많이 변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내려왔고, 마지못해 따라야만 했던, 그래서 우리들을 불편하고 난감하게 만들었던 풍속이 달라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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