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10월달에 접어드니 날 밝기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새벽 5시반경이면 창밖의 사물들이 희미하게나마 비쳐졌는데 이제는 깜깜하다. 이 시간은 내가 완전히 덜 깬 잠결에서 주섬주섬 운동복을 찾아 갈아입고 현관문을 나서는 때다. 바깥에서 심호흡을 해보면 바람이 다소 서늘해진 터라 기분조차 상쾌해진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초등학교 입구로 들어서면 동네 사람 몇몇이 그룹을 지어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운동장을 열 바퀴 돌고나면 50분 정도 소요되는데 새벽에 운동장을 걸으며 혼자 생각하는 이 시간은 내게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운동이든 취미든 생활패턴을 바꾸는 것은 누구에게든 쉽지만은 않다. 특히 수면시간을 줄여 일찍 일어나 새벽에 하는 일들은 더욱 그렇다. 아직 습관화되지는 않았지만 나의 새벽운동은 그럭저럭 4개월이 됐다. 어떤 날은 새벽같이 기상하기가 싫은 때도 있지만 그 때마다 운동을 끝내고서 느껴보는 상쾌함을 상상하노라면 순간적으로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된다. 행하기 어려운 일도 반복되다보면 정해진 그 과정을 순조롭게 마친다는 것은 하나의 성취감이다.

집 가까이 학교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주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운동장에서 조깅 등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작은 행복인데, 새벽녘 초등학교 운동장을 걷다보면 왠지 모르게 나는 기분이 좋다. 시간이 아직 일러 아이들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자라나는 새싹들의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 담겨져 있는 곳이니 생각할수록 학교운동장은 운동하기에 안성맞춤 장소다. 그런 좋은 생각들을 하며 한 바퀴, 두 바퀴 도는 회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길을 걷는다. 보행로 주변에 늘어선 느티나무 밑을 걸으면서 나뭇잎이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때로는 밝아오는 하늘도 보면서 이것저것 헤아려보는 순간들이 의미 있게 다가서는 새벽이다.

그저께도 여느 날처럼 학교운동장을 걷는데 건물 정면 쪽에서 젊은 남녀들의 큰 소리가 들려왔다. 평상시에는 새벽 운동하는 지역주민들이 도보 도중 나누는 낮은 대화는 들려왔지만 취기가 잔뜩 묻은 음성은 처음이었다. 가까이로 걸어가면서 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 셋이서 운동장 교대에 앉아서 이야기 중이었고, 자리 주변에는 소주병 너댓 병이 널려있었다. 아마 젊은이들이 밤새워 술 마신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른 시간에 새벽운동 하는 동네 어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에 취해 큰 소리로 떠드는 행동이 내 눈에도 거슬렸다.

어디서 이야기 들었는지 학교 인부가 나와서 젊은이들에게 꾸지람을 해서 그들의 새벽까지 이어진 술판은 끝이 났지만 운동장을 걸으면서 그 장면을 잠시 지켜본 나도 어이가 없었고 심란했다. 새벽시간에 그 청년들이 술에 절은 모습으로 집에 들어가서 부모에게 무어라 말할까? 친한 친구와 놀았다고 적당히 변명할까, 아니면 아무 말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못잔 잠이라도 잘까? 그것도 아니면 그 청년들은 도시에 혼자 나와 사는 애들일까. 상상하지 않아도 좋을, 별의별 생각까지 내가 한 것은 아무래도 그 청춘들의 행동이 못마땅해서다.

주말에 운동장을 지역주민에게 개방한 학교가 많다. 서울만 따져보아도 공립학교 926곳 가운데 832개교(89.8%)가 개방해 공원이나 운동시설 등이 부족한 주민들의 조깅 등 유용한 장소로 제공되고 있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부작용도 만만치가 않다. 며칠 전 내가 목격한 것처럼 청춘 남녀 셋이서 학교운동장 교대에서 밤새워 술 마시며 노는 장소로 사용하는 것은 예사이고 학교시설 개방으로 인한 더 큰 교육적 악영향이 도사리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이 문제를 두고 주민들과 교육청, 학교 간 논란이 뜨겁다. 서울시의회는 지난 9일 ‘서울특별시립학교 시설의 개방 및 이용에 관한 조례’ 일부 개정 조례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학교장과 서울시교원단체총연합회가 반대하고 나섰는바 그 이유는 일부 이용객들이 운동장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담벼락에 함부로 대소변을 보며 심지어 학생 폭력까지 발생하는 등 피해가 크다는 것이다. 학생 교육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시설 개방은 불가하다는 주장인데, 주말과 평일 방과 후 인근 학교 운동장을 많이 이용하는 주민 스스로의 수범적 자세가 중요하다.

근래 들어 출생률이 낮아지고 취학아동 수가 감소세를 보이면서 지역사회 내 연대감이 점차 엷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지역사회 학교는 본래의 목적성에 더 치중돼야 한다. 지역사회 학교는 허용 범위 내에서 학교시설을 지역사회에 개방하고, 중심지 역할을 다해야 할 터, 그래야만이 교사-학생-학부모로 이어지는 학훈(學訓)적 연결고리와 유대성은 향상될 것이다. 더욱이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유대적 관계가 차단될 계제(階梯)마저 있는 데다가 학교시설 개방에 대해 학교장들이 반발하고 있다니 학교가 공동사회적 성격보다는 이익사회로 흘러가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생활체육시설이 태부족인 도시 사정에서 학교시설의 일정 개방은 불가피한데, 이를 이용하는 지역주민들의 학교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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