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장석남(1965~  )

 

우두커니
문 열린 세탁기야
때 묻은 하늘이나 넣을까
기다림이나 넣을까
커피나 한잔 내려 마시고
시골 빨래 서울 빨래
겨울 빨래나 넣을까

매일매일 덕을 쌓는 세탁기야
해 입 벌린 바보야
봄아

 

[시평]

뚜껑을 헤벌쭉 열어놓고 서 있는 세탁기 마냥,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을까. 뚜껑이나 열어놓고 때가 절은 빨래나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세탁기처럼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그리고는 온몸을 덜덜 돌려가며 세상의 온갖 때란 때는 다 빨아주는, 그런 사람 이 세상에 있을까. 그런 사람이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성자(聖者)임이 분명하다.

시골 빨래, 서울 빨래, 겨울 빨래, 때 묻은 하늘까지 모두 모두 받아들이고는, 커피나 한잔 마시는 그 시간, 세탁기는 그저 바보 마냥 덜덜거리며 돌아가기만 한다. 이렇듯 세상의 때란 때 모두를 빨아주는, 그렇게 그 누구도 모르게 덕을 쌓고 있는 세탁기. 

비록 남들에게는 그저 입이나 헤 하고 벌리고 서 있는 바보같이 보이고 있지만, 이런 사람이 있으므로 그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그래서 또 다시 따사롭고 또 정갈한 봄 우리의 곁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 봄같이 따사로운 삶, 봄같이 정갈한 삶, 우리의 곁에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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