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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사헌부·홍문관 일컬어

국정은 물론, 왕 사생활도 지적
중대한 사안이면 ‘합소’ 올려
正道 위해서라면 왕명도 어겨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전하, 그릇된 행동이옵니다.”

주된 업무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정도(正道)를 위해서라면, 왕일지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누군가 얼굴에 침을 뱉는다 해도, 쓴소리를 내야 했다. 그게 ‘언론(言論)’의 사명이었다.

◆조선시대 언론기관 ‘삼사’

조선시대 언론의 사명을 주된 임무로 삼았던 ‘언관(言官)’. 언관은 임금에게 간하는 일을 맡은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의 벼슬아치를 말한다. 오늘날로 치면, 언론기관·감사원·검찰의 성격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사간원은 왕의 정치를 비판하는 언론기관이요, 사헌부는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는 기관이었다.

이후 세조 대에 ‘홍문관(弘文館)’이 세워진다. ‘널리 많은 글이나 책을 모아놓은 집’이라는 뜻으로, 왕의 정치와 학술 교문, 교지 작성 등의 기능을 맡았다. 그래서 언론기관인 삼사(三司)를 이룬다.

삼사에서는 일반 국정은 물론이고 왕의 사생활까지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왕비와 종친, 외척의 생사를 좌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대한 사안일 경우 세 부서가 함께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바로 ‘합소(合疏)’다.

◆당대 최고 권력자도 탄핵

언관은 당시 조선의 최고 권세를 떨친 한명회(韓明澮)를 탄핵해 공직에서 물러나게 만들기도 했다. 한명회는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수양대군(세조, 제7대 왕)이 왕이 되기까지 지략의 중심이 된 인물이다. 영의정을 지냈고 두 딸을 각각 예종(제8대 왕)과 성종(제9대 왕)의 후궁으로 들이면서 왕의 장인으로서 무한한 권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노년을 위해 지은 ‘압구정(鴨鷗亭)’이라는 정자에서 중국사신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싶어했다. 그래서 1481년 6월 25일, 성종에게 아뢰었다.

“신의 정자는 본래 너무 좁아서 더구나 지금처럼 날씨가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가 어렵사옵니다. 하오니 주상전하께서 해당부서의 관원에게 명하시어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대만(大幔)을 치게 하시옵소서!”

대만은 커다란 장막으로, 국왕이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말한다. 이는 용과 봉의 형상이 새겨진 차일로, 왕만 쓸 수 있는 차일인데 이걸 한명회가 요청한 것이다. 성종은 공식 별장인 제천정을 사용하면 될 것을 개인 별장에서 대접할 필요가 있느냐며 그의 청을 거절했다. 한명회는 어떻게 했을까. 아내가 몸이 아파 잔치 참석이 불가능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 같은 한명회의 태도에 대해 사헌부는 ‘도가 지나쳤다’며 당대 최고 권력자를 낙마시켰다.

◆왕명보다 ‘정도’의 길 선택

의(義)를 위해 임금의 명령을 어기기도 했다. 1493년 10월 27일. 성종은 대간의 탄핵을 받은 재상 윤필상의 사직을 만류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 명을 받은 홍문관원 유호인은 왕명이 부당하다고 여겨 이를 거부한다. 성종이 왕명을 거부한 유호인을 국문하려고 들자 동료 시강관 성세명이 왕에게 가서 따졌다.

이에 성종은 “신하가 되어서 임금의 명령에 따르지 아니하는 것이 의리에 편안하겠는가, 일이 사직(社稷)에 관계되지 아니하는데 어찌 따르지 않아야 할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성세명은 “신하의 도(道)는 의(義)를 따르고 임금을 따르지 아니합니다”라고 답한다.

이처럼 언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 앞에서도 바른말을 당당히 해야 하는 존재였다. 오늘날은 어떨까. 권력과 타협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해 ‘정도’의 길로 나가는 것. 그게 이 시대 언론의 사명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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