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수도인 한양 주변에 도성을 쌓았다. 그리고 성 안에 드나들 수 있는 동서남북에 문을 만든다. 그러면서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문 이름에 담아 놓는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인(仁)’, 서쪽 돈의문(敦義門)은 ‘의(義)’, 남쪽 숭례문(崇禮門)은 ‘례(禮)’다. 그리고 북쪽 숙정문(肅靖門, 전 숙청문)은 ‘지’를 상징한다. 다만, 당시 백성이 지혜로워지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워진다며 ‘지(智)’자 대신에 ‘청(淸)’자를 넣었다고 한다. 선조들의 삶을 담고 있는 4대문, 역사 속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보자.

 

▲ 한양 동쪽을 지키던 흥인지문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왜구 침입 잦은 한양 동쪽
반원 모양 옹성 튼튼히 쌓아
빈민 위한 급식소도 설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 12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린 시절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다. 우리 내 입가에 ‘흥얼흥얼’ 불리던 가사 속의 첫 대문. 동대문으로 유명한 이 문의 원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차곡차곡 쌓인 울퉁불퉁한 돌들은 마치 서로를 챙겨주는 듯했다. 긴 세월이 무색할 만큼 도심 한복판에 굳건히 서 있었다.

흥인지문은 1963년 보물 제1호로 지정됐다. 태조 5년(1396년)에 지었으나 단종 때인 1453년에 대대적으로 고쳤다. 현재 남아있는 문은 고종 6년(1869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숭례문에 비하면 그 역사가 짧다고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이름이 네 글자다. 처음에 지어질 당시엔 이름이 ‘흥인문’이었는데, 여기에 지(之)자가 첨가됐다. 예로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지(之)자를 첨가했다고 한다.

또 흥인지문은 ‘동방’이라는 뜻이 담겼다. 흥인지문의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속하고, 방위는 동쪽을 나타낸다. 이런 이유로 동대문으로 많이 불리었다.
 

▲ 한양 동쪽을 지키던 흥인지문 성벽.ⓒ천지일보(뉴스천지)


◆사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 있어

흥인지문은 서울의 숭례문과 더불어 규모가 큰 성문이다. 특히 사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다. 옹성이란 ‘철옹산성(鐵甕山城)’의 준말이다. 옹성은 적을 막기 위해 성문 밖에 일정한 높이의 옹벽을 친 것이다. 특히 흥인지문은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성문 바깥쪽으로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다.

2층으로 된 문루(門樓,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도 있다.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했다. 2층 문루는 숭례문과 흥인지문밖에 없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흥인지문은 다른 문보다 짓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낙산 비탈에서 갑자기 지대가 푹 꺼진 지역에 대문을 만들었기 때문. 밑에 돌을 포개어 올리고 그 후 성을 쌓는 방식을 사용했다.

▲ 태극문양이 있는 문 ⓒ천지일보(뉴스천지)


◆흥인지문에는 어떤 일이?

흥인지문은 한양의 주요 도로를 잇는 실질적인 출입문이었다. 파루(罷漏, 새벽 5시경)에 문을 열고, 인정(人定, 밤 10시경)에 문을 닫아 사람들의 통행시간을 조절했다.

왕들이 동교(동대문밖)에서 사냥할 때 오가던 길목이기도 했다. 태종(조선 제3대 왕)이 아버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 참배를 하기 위해 드나들기도 했다.

큰비가 내려 종루(조선시대 한성부의 도성 내 중심이 되는 곳에 종을 단 누각)에서 흥인지문까지 사람 출입이 통제된 적도 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410년 7월 17일 폭풍이 불고 큰비가 내렸다. 전달에는 오래 가물고, 이달에는 음우(陰雨)가 연일 계속했는데, 이날에는 아주 심했다. 도성에 물이 넘쳐서 종루 동쪽에서부터 흥인지문까지 사람이 통행하지 못했다.

빈민을 위한 무료 급식소가 설치되기도 했다. 숙종 재위 당시, 잇따른 재해로 인심이 흉흉했다. 특히 1695~1703년 사이에 지독한 흉년과 전염병 창궐, 그리고 엄청난 대홍수가 이어졌다. 숙종실록(1696년 1월 19일)에 따르면 진휼청(賑恤廳)에서 굶주린 백성이 많이 모이기에 설죽소(設粥所, 죽 제공소)를 동대문밖에 더 설치하기를 청했고, 이를 임금이 윤허했다. 이후 임금은 비밀리에 별감을 수시로 보냈는데, 상황을 알고 개탄스러워 했다.

“설죽소에 별감을 보내어 굶주린 백성이 먹는 죽을 가져오게 하였더니, 처음엔 제법 죽의 양이 넉넉하고 쌀알도 많았다. 평소에도 그런지 보려고 또 가져오게 하였더니, 양이나 질 모두 형편없었다. 이래 가지고서야 굶주린 백성들이 살 수가 있겠는가.”

이에 임금은 동서의 설죽소에 이 뜻을 각별히 전하라고 지시한다. 또한 임금의 장례 행렬이 흥인지문을 통해 갈 때도 잦았다. 태릉, 동구릉 등 임금의 능이 대개 한양 동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흥인지문은 한양의 동쪽을 지키며, 백성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지금은 글과 사진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조선시대. 하지만 그때를 하나하나 소중히 기억해주고 있는 듯 흥인지문에서는 그윽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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