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아니, 이럴 수가. 사육신(死六臣) 공원에 ‘사칠신’이라니. 지난 주말에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공원을 찾았다. 그런데 의절사(義節祠) 사당에는 위패가 7개이다. 묘역에도 묘가 7개이다. 

너무 황당하여 인터넷에서 ‘사육신 공원’을 검색했다. 그랬더니 “1978년에 서울특별시가 사육신 묘역을 확장했는데 이 때 사육신 논란이 있어 김문기를 추가하여 일곱 분의 묘가 모셔지게 됐다”고 설명돼 있다.  

1978년에 사육신 논란이 있었다면 박정희 대통령 때인데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재호 교수의 저서 ‘조선사 3대 논쟁’ 책의 ‘사육신, 유응부인가 김문기인가’에 그 연유가 적혀 있다.

1976년에 한 방송작가가 조선일보에 “추강 남효온이 쓴 ‘육신전’ 중의 유응부는 김문기를 잘못 기재한 것이므로, 사육신은 유응부가 아니라 김문기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 주장에 국사편찬위원회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논쟁에 가세했다.  

1977년 9월 22일 특별위원회는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이 사실이 9월 23일 동아일보에 보도됨으로써 국민들의 큰 관심과 혼란을 일으켰다. 일부 학자들은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러자 1978년에 국사편찬위원회는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허장(虛葬)을 봉안하고, 유응부의 묘도 그대로 존치한다’는 애매모호한 결정을 내려 ‘사육신 묘소’가 ‘사칠신 묘소’로 바뀌고 말았다.   

원래 ‘사육신’은 생육신(生六臣) 남효온(1454~1492)이 지은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비롯됐다. 남효온은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육신전’에 기록했다.  

그러나 세조 이후 사육신 거론은 금기사항이었다. 심지어 1576년에 판서 박계현이 경연에서 “성삼문은 참으로 충신입니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보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선조는 즉시 육신전을 읽어보고 크게 놀라 하교하기를, “엉터리 같은 말을 많이 써서 선조(先祖)를 모욕하였으니, 육신전을 모두 찾아내어 불태우겠다. 이 책에 대해 말하는 자의 죄도 다스리겠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76년 6월 1일자)

그러다가 1691년 12월 6일에 숙종은 성삼문 등 여섯 사람을 복작하였으며, 노량진 사당에 민절(愍節) 편액을 내렸다.  

더 나아가 1791년에 정조는 영월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모든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임금의 명에 의해 공신의 신주를 배향하는 것)’을 편정하도록 했는데, 여기에는 사육신뿐만 아니라 육종영(六宗英), 사의척(四懿戚), 삼상신(三相臣), 삼중신(三重臣), 양운검(兩雲劒) 등이 망라돼 있다. (정조실록 1791년 2월 21일자)  

여기서 육종영은 안평대군·금성대군 등 여섯 종실이고, 사의척은 송현수·권자신 등 네 외척, 삼상신은 김종서·황보인·정분, 삼중신은 민신·조극관·김문기, 양운검은 성승·박쟁을 말한다. 이렇게 정조 때 사육신과 삼중신은 확연히 정리됐다. 

그런데 1978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어정쩡한 결정으로 사육신은 사칠신이 됐고, 최근에는 사육신 제사상을 뒤엎은 사건에 대법원이 벌금형을 선고했다. 역사가 먹칠됐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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