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베스트셀러인 태인 방각본. (출처: 정읍시립박물관)

방각본, 판매 위해 만든 책

태인지역, 다른 곳보다 앞서
개화 열망한 시대정신 반영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술 마시고 밥 먹을 때의 형·아우 하던 자들은 천명이나 되더니, 급하고 어려울 때의 친구는 한 명도 없네.’ (‘명심보감초’교우 편)

예나 지금이나 어찌 이렇게 상황은 비슷할까. 고려시대 편찬된 어린이 학습용 책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 만든 손기조(孫基祖)의 ‘명심보감초’. 유교적 교양을 중시했던 조선시대, 백성들은 방각본을 통해 이 같은 삶의 지혜를 배웠다.

특히 방각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중심에는 전라북도 작은 고을인 ‘태인(泰仁)’이 있다. 조선시대 온 나라를 소설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 가보자.

▲ 정읍시립박물관의 태인 방각본 제작회의 모형. ⓒ천지일보(뉴스천지)

◆방각본이란

‘방각본(坊刻本)’은 판매를 위해 만든 책이다. 책을 어디서 만들었는가에 따라, 관청에서 만든 책을 관판본(官版本), 지방감영에서 만든 책을 감영본(監營本), 절에서 만든 책을 사찰본(寺刹本), 개인이 주문받아 생산한 책을 사간본(私刊本), 판매를 위해 만든 책을 방각본이라 부른다.

제작 방식에 따라 필사본, 목판본, 활자본으로 분류된다. 이중 방각본은 지역에 따라 태인판(태인), 경판(서울), 완판(전주), 안성판(안성), 달성판(대구), 금성판(나주) 등으로 나뉜다.

◆태인 방각본, 무슨 내용 담겼나

태인 방각본은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내용상으로 보면 우선공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한 서적이 많았다. 이는 태인 지역이 공자를 알리고 기리는 작업에 앞장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적 교양이나 교화를 강조하는 내용의 서적도 출판됐다. 태인 지역이 향약을 실현하기 위해 발간한 것이다. 유교 내지 유학 관련 서적은 과거 시험 대비용으로 활용됐다.

농사 기술이 담긴 서적도 발간됐다. ‘농가집성’이다. 굶주림을 구제하기위해 만든 ‘신간구황찰요’도 있다. 선비들이 보는 시와 관련된 책도 있다. 또 중국역사에 관한 책도 있다. 이 같은 태인 방각본은 삶에 필수적인 부분을 담고 있어, 백성에게 읽히고 또 읽혔다.

▲ 유충열전의 책판이 일본인에 의해 분첩으로 변형돼 사용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출판문화 앞선 태인

주목할 점은 태인 방각본 출판의 경우 다른 지역보다 앞섰다는 점이다. 이는 이 지역민들이 지식에 대한 개화를 열망하는 시대정신이 반영된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태인 방각본으로 알려진 책은 10여권이다. 조선시대 방각본 출판의 경향을 보면, 유교지식의 함양에서 한글소설로의 이행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서민문화의 팽창, 서민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희구, 그리고 여성들의 오락 등이 있다.

일부 양반층은 소설 작가로 활동했다. 이들은 작품 속에 사회개혁이나 현실 극복의 메시지를 담았다.

방각본의 성행은 조선시대의 신분적 좌표가 흔들리기 시작한 증좌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인구 증가, 농민 계층 분화 심화, 양반층 분해, 노비제 해체, 독립자영 수공업자와 상업노동자 등 새로운 계층이 늘어났다. 서적이 상품화된 건 불특정 다수를 겨냥했다는 것을 말한다. 태인 방각본의 책판은 전주와 대구로 옮겨져서 1800년대 말까지 계속 출판됐다.

조선 팔도 중 작은 고을에서 촉발된 방각본은 시대적 욕구를 잘 대변했다. 서울 경판본, 전주 완판본, 대구 달성판본 등은 상인의 손을 거치며 원판을 그대로이용하기도 하고 간기를 깎고 다시 신간으로 재판하기도 했다. 이후 1912년 근대적인 인쇄기술인 활판인쇄술로 고소설이 대량으로 간행된다.

▲ 광해군 시절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며 낙향해 초탈한 삶을 살았던 10명의 선비들이 송정에 모인 모습을 그린 송정십현도. 책을 항상 지니고 공유하며 소중하게 다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왜 ‘태인’ 지역인가

그렇다면, 왜 태인 지역이 방각본 탄생의 토양이 됐을까. 이는 태인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신라시대 학자 고운(孤雲)최치원은 886년 태산군 태수로 부임한다. 그는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찾아 유람하면서 백성에게 유교주의적 덕치를 베푼다. 유상곡수와 한시문학, 유학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이 기간 그가 체득한 우수한 문화는 이 고장에 뿌리 내린다.

또 불우헌 정극인 선생의 고현동 향약, 눌암 송세림, 영천 신잠의 선정정치, 일재 이항의 실천유학 등 조선조 500년 동안 이 지역이 호남 사림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그리고 절조와 온후를 겸비한 선비 기질의 유풍이 이어진다.

지리적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에 고부군, 태인현, 정읍현이라는 세 고을이 번창했다. 특히 태인현을 포함한 동진강 유역에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조선 곳간의 세 수입의 40%를 차지했다. 동진강을 통해 서해로 유입되는 해상교통로와 삼남대로의 육상교통로를 가지고 있는 자연지리적인 요충지였다.

이러한 경제적, 문화적 배경과 함께 당시 태인 현감의 지원과 지역 유지들의 후원에 힘입어 방각업자가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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