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우리나라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선비魂 서린 향교의 본원 ‘성균관’

종로구 명륜동 유림 ‘성지’, 234개 향교 중 ‘본원’ 격

대성전이 명륜당 앞에 위치한 ‘전묘후학’의 독특한 건축구조
대성전 앞 길게 뻗은 ‘신의 길’ 사람이 함부로 지날 수 없어

▲명륜당 뒷 편에서 바라본 수령 4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9호).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박완희 기자] 600년간 조선시대 인재들이 모여 유학을 공부했던 곳으로 유명한 성균관(成均館). 그런데 성균관이 유교(유림)를 대표하는 성지(聖地)라는 사실은 사람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유교를 종교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유교는 종교라고 내세울 만한 필수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삼경(시경, 서경, 주역)을 비롯한 경전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에 유림들은 성현들의 말씀이 기록된 경전을 익히고 배우며 살아간다.

자, 그럼 지금부터 기자와 함께 유교 성지 성균관으로 떠나보자. 성균관은 서울 문묘(보물 제141호)와 함께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자리하고 있다. 4호선 혜화역에서 성균관대 입구 사거리를 지나 성균관대학교 방향으로 10여분을 걸었더니, 동무의 외벽이 보였다. 많은 대학생들이 휴대용 선풍기를 손에 쥔 채 신삼문(神三門) 앞길로 지나다닌다. 다시 시선을 돌리고 외벽을 바라보며 걸었더니 주차 시설이 나타났다. 성균관의 정문 격인 신삼문은 현재 닫혀 있어 주차 시설을 통과해야 한다. 3m는 더 돼 보이는 높은 담장이 이어진다. 담장 너머로 여러 채의 기와집 지붕이 고개를 내민다.

▲유림들이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인 추기석전대제를 드리기 위해 식순을 연습하고 있다. 사진은 학관과 유생들의 교육공간이었던 명륜당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명륜당(明倫堂) 중심의 교육 공간

향문을 지나 좁은 협문을 통과하면, 수령 4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9호)와 명륜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순간 여기가 서울이라는 생각은 싹 잊혀진다. 눈에 보이는 잎사귀들이 아직 푸르른 것을 보니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가을이 늦다.

명륜당의 큼지막이 적힌 현판 글씨는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으로 전해지는데, 여기서 ‘명륜’이라는 말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다.

마침 성균관은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인 추기석전대제(秋期釋奠大祭) 준비로 한창이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도포를 입은 유림들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이 조선시대인지 착각이 든다.

명륜당과 은행나무 사이의 넓은 뜰을 바라보고 있으니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이곳에서 학관(學官)과 유생들은 학문을 가르치고 배워왔다.

명륜당을 눈썰미 있게 보면 세 동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지붕의 높이는 본채와 익실이 각각 다르다. 이 점을 미루어 봤을 때 같은 한 건물 내에서 명확한 위계를 두고 사용했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연결돼 있고, 익실인 양쪽 날개채에는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다.

명륜당 앞 좌우로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생활했던 기숙사라고 하는데, 가까이서 보니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툇마루가 놓인 것이 독특하게 보였다.

명륜당 뒤쪽은 도서관으로 사용됐던 존경각과 그 옆으로는 육일각이 있다.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른 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하기 위한 수련을 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대체로 건물 구조는 단순 간결한 느낌이다. 단청(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무늬를 그린 것) 역시 뇌록과 석간주 등 두어가지 색만으로 채색돼 침착하고 온아한 인상을 뽐냈다.

▲신삼문에서 바라본 성균관의 대성전 전경. 신삼문 앞에 놓인 쭉 뻗은 길은 신이 다니는 길로써 대성전의 서계(왼쪽 계단)와 연결돼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대성전 중심의 제사 공간 ‘문묘’

명륜관에서 북장문을 지나면 대성전 보다 묘정비각과 동무·서무, 신삼문 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 기준으로 좌우에 있는데, 이 영역을 제사 드리는 공간인 문묘라 일컫는다.

성균관은 234개의 향교 중 본원 격이라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향교는 대성전이 명륜당 뒤에 위치한다. 반면 성균관은 대성전이 명륜당 앞에 위치한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구조로 돼 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이것이 산교육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사준비로 분주했던 명륜당과는 다르게 대성전은 고요했다.

이 곳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의 위패를 찾아볼 수 있다. 공자를 포함한 맹자·증자·안영·자사 등 5성(聖)과 공자의 제자들인 10철(哲), 송나라 6현(賢), 한국 18현(賢) 등의 위패들이다. 한국 18현의 경우 원래 대성전 앞 동·서무에 있었지만, 1949년 6월 전국유림대회 결의로 인해 대성전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성균관 밖에서 바라본 신삼문 측면  ⓒ천지일보(뉴스천지)

제례 등 행사 때 사용됐다는 신삼문 앞에서 대성전을 바라봤다. 50m쯤 될까. 이곳에서 훤히 보이는 대성전의 현판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시선을 조금만 내리면 대성전까지 이어진 쭉 뻗은 길이 보인다. 이 길은 대성전 좌우에 위치한 두 개(서계, 조계)의 돌계단 중 서계(왼쪽 계단)와 신삼문이 연결돼 있다.

성균관 박광영 의례부장은 “계단 사용에도 우리의 예법이 있다”며 “조계로 오를 때는 먼저 오른발을 내딛고, 반대로 내려갈 때는 왼발을 먼저 내디뎌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계단과 건물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것이지 정형화된 법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박 부장은 “신삼문과 이어진 서계는 사용하지 않는다”며 “신삼문은 신이 다니는 문이고, (신삼문과 연결된) 이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신이 다니는 길을 사람이 함부로 밟을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이 길을 가로질러 가야 할 때는 허리를 숙여, 마음속으로 ‘죄송합니다’하고 말하고 지나가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성균관은?

성균관은 1397년 2월 조선 태조의 명으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지금의 성균관 터를 선정하고, 1398년 7월에 준공했다. 그러나 성균관은 완공된 지 불과 1년 반 만인 기원후 1400년(정종 2년)에 소실되는 비극을 맞는다. 1407년(태종 7년)에 재건됐지만,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또 소실돼 1601년 대성전과 명륜당, 부속건물 등을 연차적으로 중건·보수해 현재에 이르게 됐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성균관이 전화로 잿더미가 되는 가장 큰 시련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 성균관 건축물 배치도.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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