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한국기업관리대학 학장

 

조선 최고의 부자는 경주 최부잣집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교훈은 상호신뢰, 사회통합, 공존공영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최부자 집안의 형성은 1600년대 초 최진립 장군에서부터 시작돼 광복 직후 최준까지 이어진다. 만석의 재산을 약 300년, 12대 동안 유지했으니 신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부잣집이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부를 유지한 비결은 무엇인가. 특이한 가훈(家訓)이 있었다. ‘육훈(六訓)’과 ‘육연(六然)’이다. 육훈이 집안을 다스리는 가훈이었다면, 육연은 자신의 몸을 닦는 가훈이었다. 그들의 육훈 실천은 감동적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다. 진사는 조선시대에 치른 과거(科擧) 가운데 소과(小科)에 급제한 것을 말한다.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진사보다 높은 과거에 급제하여 권세를 차지하면 정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공인된 최소한의 지위가 필요할 뿐, 권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마라’는 가르침이 있다. 물질문명에 사로잡힌 현대에 욕망 절제의 중요성을 간파한 가훈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다른 부잣집들보다 30% 정도 낮게 소작료를 받았다고 한다. 때문에 최부잣집 소작인들은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소작인들이 최부잣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했다는 원칙은 민심을 보살폈음을 알 수 있다. 과객들로 하여금 최부잣집의 인심이 소문났기에 동학 이후 발생한 활빈당의 횡포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흉년기에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이웃의 어려운 상황을 악용하여 부정적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상도를 지켰다.

다음으로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다. 이 가훈의 유래를 살펴보면 신해년(1671)에 흉년이 들었을 때, 1대 부자인 최국선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곳간을 헐어 보살폈다는 일화가 있다. 이러한 선행이 상생의 철학이 아닌가 한다. 빈민을 구제하고 부를 사회에 환원했다는 점은 구휼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는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했다.

또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는 가르침이 있었다.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고 근검, 절약정신을 강조한 생활철학이다.

근래 들어 무한경쟁에서 성과를 최대치로 올리기 위해 다양한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사회통합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이러한 시점에 최부잣집의 가훈은 사회통합과 공존공영을 견인하는 현실성 있는 원칙이 아닐 수 없다.

명가(名家)의 전통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려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밀착서비스를 펼쳐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접점이 형성된다.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가 무엇인지, 원하는 코드에 맞도록 해야 한다.

‘3백년 내력의 명문가’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부를 300년 이상 이어 온 비결은 부정부패·비리를 찾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도덕적 해이, 재물욕, 명예욕에 얼룩진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과욕 없이 원칙을 만들어 이를 철저히 지켰다. 절제를 미덕으로 삼아 재산과 명예를 보존한 점은 금전만능주의가 만연한 현 시점에 상생의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목전의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을 생각하고 공존공영을 실천하고자 한 원칙에서 아름답고 도덕적인 부(富)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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