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수도인 한양 주변에 도성을 쌓았다. 그리고 성 안에 드나들 수 있는 동서남북에 문을 만든다. 그러면서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문 이름에 담아 놓는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인(仁)’, 서쪽 돈의문(敦義門)은 ‘의(義)’, 남쪽 숭례문(崇禮門)은 ‘례(禮)’다. 그리고 북쪽 숙정문(肅靖門, 전 숙청문)은 ‘지’를 상징한다. 다만, 당시 백성이 지혜로워지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워진다며 ‘지(智)’자 대신에 ‘청(淸)’자를 넣었다고 한다. 선조들의 삶을 담고 있는 4대문, 역사 속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보자.

 

▲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인 숭례문 ⓒ천지일보(뉴스천지)

현존 성문 가운데 규모 가장 커
남쪽, 陽의 기운 불러온다고 믿어
화재로 1층 문루 불탄 아픔 있어
국가적 상징, 신성한 곳으로 여겨
종이등 달고 예불하던 행사 열려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청명한 가을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숭례문(崇禮門)’. 도성을 지키는 강한 군사같이 그 모습은 꿋꿋해 보였다. 600년간 눈·비바람에도 끄떡 않고 한 자리를 지켜와 더 강인하게 느껴졌다.

숭례문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 4대문 중하나다. 조선 태조 7년(1398) 한양 도성의 남쪽 대문으로 세워졌다. 숭례문은 현존하는 한국의 성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2008년 2월 10일 발생한 화재로2층 문루(門樓,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지은 다락집)가 소실된다. 또 1층 문루 일부가 불타버린다. 당시 많은 국민은 국화꽃을 들고 나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았다.

화재 당시 숭례문 현판은 소방관들의 노력으로 구할 수 있었다. 이 현판을 누가 적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정도전, 양녕대군 등의 이름이 나올 뿐이다.

한양을 지키던 네 개의 문 중 으뜸가던 이 문은 재건됐음에도, 웅장함과 간소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 숭례문 지키는 파수꾼 ⓒ천지일보(뉴스천지)

◆단순한 출입문 아냐… 쓰임새 다양

숭례문의 쓰임새는 다양했다. 성문과 주변에 군사를 배치해 도성 내부의 왕궁과 백성을 파수한 것은 물론, 통금시간에는 성문을 닫아 출입을 통제했다. 매일 밤 인정(人定, 10시 경)에 문을 닫았다가 다음 날 아침 파루(罷漏, 새벽 5시경)에 문을 열었는데, 이때 문루에 종을 달아 그 시간을 알렸다.

장마나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이 몸소 기청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등 숭례문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곤 했다.

실제로 1782년 정조는 익선관에 곤룡포만 걸친 채 숭례문 인근의 남단(南壇,현재 환구단)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

특히 가뭄이 심하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옛날 사람들은 남쪽의 숭례문에서 양의 기운이 들어오고 북쪽의숙정문에서 음의 기운이 들어 온다 믿었다. 이에 양의 기운이 넘치는 가뭄 때는 양의 기운을 줄이고 음의 기운을 늘리기 위해 숭례문은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1469년 7월 13일 예종실록에 따르면, 저자(시장)를 동현으로 옮기고 숭례문을 닫게 했다. 한재(旱災, 가뭄으로 인한 재앙)가 매우 심하지 않아도, 임금은 백성의 일에 마음을 졸이고 농사를 상하게 할까 깊이 두려워 해 이같이 행했다. 그리고 같은 달 18일, 비가 왔다 하여 숭례문을 열고 다시 저자를 열었다.

성종(2년) 때도 마찬가지다. 6월 2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가뭄이 심하니, 청컨대 사시(徙市, 몹시 가물 때에 기우제를 지내며 시장을 옮기던 일)하고 숭례문을 닫게 하며 격고(擊鼓, 북을 두드림)하지 마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숭례문 성벽 ⓒ천지일보(뉴스천지)

반대로 장마가 내리면 숭례문을 열고, 숙종문을 닫았다.

또 숭례문에서는 ‘종이 등(燈)’을 달고 예불하던 노등(路燈) 행사가 열렸다. 이는 세종 때 남대문에서 종로까지 열 자 간격으로 종이 등을 달고 예불(禮佛)하며 노래하고 놀던 풍습이다.

1431년 9월 12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창성이 두목을 시켜 지등(紙燈) 700개를 만들어 숭례문으로부터 누문(樓門)·종루(鍾樓)·야지현(也知峴)·개천로(開川路) 위에까지 열 자 간격으로 등을 달고 불을 켜서 예배(禮拜)를 행했다. 또 악공 18명과 승도 20명으로 하여금 소리를 하며 즐겼는데, 이름을 노등이라고 불렀다.

‘헌괵례’가 거행되기도 했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가 임금에게 적의 머리를 바치는 의식이다.

이처럼 숭례문은 단순한 도성 출입을 위한 문의 개념이 아니었다. 국가적 상징이자, 천재와 관련된 신성한 곳이었다. 또 민중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그 시절에도, 지금도 숭례문은 꿋꿋이 한 자리에 서 있다. 2008년 화재로 한 번의 아픔을 겪긴 했지만, 그 웅장함은 변치 않고 있다. 오늘날도 도심은 날마다 변하고 있다. 하지만 600년을 지킨 숭례문의 기개는 영원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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