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 봉황각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독립운동가의 요람 ‘봉황각’

손병희, 독립운동 지도자 양성… 의친왕과 나라 미래 논의하기도
우이동 임야 구입 수련도장 건축 일제의 눈 피해 독립모의에 적합

1912년부터 3년간 483명 수련 3.1독립운동 계획 논의 비밀모임
민족대표 중 천도교 15인 배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정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성한 가을이 깊어지는 9월, 청명하게 높고 푸르른 하늘이 마음속까지 상쾌하게 한다. 넉넉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친인척을 정답게 맞이하는 추석을 며칠 앞두고 민족종교 천도교의 성지 ‘봉황각(鳳凰閣)’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서울 전철 4호선 수유역에서 내려, 120버스를 올라타 우이동 종점에 도착했다.

가을을 시샘하듯 햇볕이 내리쬈다. 북한산을 오르는 등산길 초입에 자리하다 보니 등산객이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기자가 목적지를 향해 걸어 먼저 도착한 곳은 봉황각 인근에 있는 손병희 선생의 묘역이다. 손병희 선생과 봉황각은 그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목적지로 발길을 돌려 드디어 북한산 인수봉 등 주위 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봉황각에 도착했다. 이곳은 천도교 수도자들을 훈련시킨 ‘의창수도원’이라고도 부른다.

▲ 천도교 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민족 지도자들을 지도·양성한 민족의 성지 ‘봉황각’의 내부 구조다. 손병희 선생의 영정과 그 당시 수련생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도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독립투사 배출한 민족의 성지

현대를 사는 많은 이들이 3.1운동하면 떠오르는 게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탑골공원 만세, 유관순 등이다. 그러나 봉황각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많다. 3.1독립운동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봉황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곳이 천도교(동학)를 이끈 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이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민족 지도자들을 지도·양성한 민족의 성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봉황각은 손병희 선생에 의해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손병희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 한일합방조약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할 곳을 물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손병희는 1911년 봄 어느 날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李堈)공과 우이동 골짜기에서 나라의 미래를 논의하기도 했다. 그는 가을에 우이동 계곡 일대 임야와 밭 9만 2383㎡(2만 7946평)을 사들이고 수련도장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 수련도장은 1912년 3월 기공하여 6월에 완공됐고, 그 이름을 봉황각이라고 지었다.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남긴 시문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서예의 대가였던 오세창이 썼는데 ‘봉(鳳)’자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서체를, ‘황(凰)’자 또한 당나라 명필 회소의 서체를, ‘각(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의 서체를 본뜬 것이다. 건물은 을(乙)자형으로 앞에 있는 집은 5칸 규모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누마루와 방을 배치하였다. 뒤에는 방 2칸을 두었다.

봉황각은 일제시대에는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인적이 한적했다. 이 때문에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을 모의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3.1운동 정신적 진원지

손병희는 1912년 4월 15일부터 이곳에서 지방교역자 21명을 선발, 지명해 수련을 시키기 시작하였는데 1914년 4월까지 3년 동안에 걸쳐 483명을 수련시켰다. 그는 하루 10시간씩 특별수련을 실시했고, 특히 ‘이신환성(以身換性, 육신의 안락을 위한 삶을 성령의 참된 삶으로 바꾸라)’의 가르침을 강조했다. 이곳에서 교육과 수련을 받은 인사들이 3.1운동을 지도하는 각 지역의 지도자로 성장해 항일운동의 선도자가 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되기도 했다. 봉황각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드러내고 있다.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는 손병희를 비롯한 간부들이 3.1운동에 임박해 이곳 봉황각에 모여 모든 계획을 논의했다. 비밀모임 때는 일제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 여사가 망을 봤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봉황각은 3.1운동의 정신적 진원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현재 봉황각 경내에는 빨간 벽들로 된 2층 건물이 있다. 예전 천도교중앙총부였던 이 건물은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현재의 수운회관이 있던 자리에 중앙대교당과 같이 지어졌으나 1969년 수운회관이 건립되면서 우이동으로 옮겨졌다. 건물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헐지 않고 이전 복원을 한 것이다.

서울시는 봉황각을 독립운동의 요람지로 보존하기 위해 1969년 9월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1919년 2월 22일 손병희 선생이 봉황각에서 하신 말씀)”

손병희 선생의 이러한 가르침이 이 시대를 일깨우는 큰 울림이 되리라 본다. 봉황각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고, 더 많은 젊은 세대가 찾아 민족의 얼을 깨우치는 교육의 장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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