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옛 모습이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크리스토퍼 델커씨가 양평여자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1960~80년대 재건 위해노력
교육 보건 등 다방면에서 활동
한미 양국 문화교류, 우호증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2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까? 평화와 발전의 동력에 헌신해 주십시오.”

1960년 미시건 대학. 존 F. 케네디 대통 령 후보는 학생들에게 이같이 연설했다. 그리고 1961년 ‘미 평화봉사단’을 만든다.

데이비드 맥캔씨도 이 연설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1966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 경상북도 안동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다. 작은 서점에서 우연히 영역된 김소월 시집을 발견한 후 한국 문학에 매료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 국내 문학의 발전에 힘쓰고 있다.

경제발전이 필요했던 1960~1980년대 대한민국. 국내에 들어온 미 평화봉사단은 한국의 재건을 위해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현재, 그들이 처음 한국에 온 지 어느덧 50년이 됐다. 우리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하는 미 평화봉사단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미 평화봉사단이란?

한국은 1950년대부터 미국의 원조를 받아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과 산업의 재건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6년 9월 14일 한미 양국 사이에 ‘미국평화봉사단에 관한 협정’이 체결됐다.

평화봉사단의 임무는 ‘세계 평화와 친선 증진’이다. 관련 국가의 국민에게 필요한 기술 인력을 보충·지원하고, 파견된 국가의 국민이 미국인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한 다른 국가 국민에 대해 미국인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다.

▲ 미 평화봉사단원들의 옛 모습이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대성중학교 영어 수업 장면. ⓒ천지일보(뉴스천지)

1966년 9월 16일 첫 번째 그룹 100명(1기·K1)이 한국에 파견됐다. 그리고 1981년 51기(K51)가 철수할 때까지 교육, 보건 의료, 지역개발, 특수프로그램 등의 분야에서 1700여명(직원 포함 2000여명)의 봉사단원이 활동했다.

◆한국에서 보낸 날들

평화봉사단의 역할은 영어교육, 보건, 농촌 지역개발 프로그램 등이었다. 교육 분야의 단원들은 2년간 전국 각지의 30여개 농어촌지역의 중고등학교에 배치돼 영어·과학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특히 영어교육에 가장 많이 힘썼다.

직무상 이들의 신분은 대학의 경우 전임 강사, 중고등학교에서는 일반교사였다. 처음 고등학교 교사로 배치된 이는 혼자서 60~7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당시, 단원들은 한국인들의 열정에 감탄했다고 한다. 교사를 한 크리스토퍼 델커씨는 “한국의 발전성과는 한국인들의 교육을 중시하는 태도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에너지, 진취적인 마음”이라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게리 에드워드 미니티에씨는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배우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이 넘쳤고, 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어요”라고 표현했다.

보건활동도 중요했다. 봉사단원들은 각 지역 보건소 등에 파견돼 한국인 요원의 협력자로 근무하며 결핵검사, 결핵예방 보건설명회, 약물치료 독려를 위한 가정방문 등을 했다.

“결핵 주사를 갖고 마을로 갔을 때 냉장고가 없었다는 거예요. 제가 알기론 영하 10도로 보관돼야 했어요.”

당시 보건 분야에서 일한 쥬리스 안 클랜시가 남긴 글은 한국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 미 평화봉사단의 모습이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사진은 봉사단원이 방과 후 학생들과 어울리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한미 관계 가교 역할

김선미 학예연구사는 “한국에서 활동한 약 2000명의 평화봉사단 관계자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프렌즈 오브 코리아 (Friends of Korea)’라는 단체를 조직했다”며 “이들은 한미 양국의 문화 교류와 우호 증진에 힘써왔다”고 말했다.

많은 봉사 단원들이 한국인과 결혼했고, 평화봉사단 활동이 끝난 후에도 한국에 남아있기도 했다. 어떤 이는 수년 후 미국의 외교관으로서 한국에 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한국학 연구자로서 한국학의 세계화를 개척하기도 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교육, 보건 활동에 서의 활동 경험이 이후 평생 직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며 “5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한미관계의 가교역할을 이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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