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관사 전경(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소재). ⓒ천지일보(뉴스천지)

비구니스님의 수행처 진관사(津寬寺), 일제에 항거한 불교 독립운동의 서울(중앙)연락본부

[뉴스천지=이길상 기자] 진관사(주지 계호스님)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또한 수륙도량으로 유명하다.

서대문 쪽에서 녹번동·불광동을 지나 연신내 사거리에서 시장 쪽의 방향으로 은평경찰서, 기자촌 사거리를 지나면 반쯤은 무성한 가로수에 가린 진관사 도로표지판이 나온다. 한창 공사중인 뉴타운 건설 현장을 만나 조금 더 올라가 우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북한산 국립공원의 표지판이 보이고 길의 맨 끝자락에 세속의 세계를 벗어나 불법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인 진관사의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도량의 건물은 주법당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전각(殿閣)이 있으며 우측에 요사(寮舍)가 배치된 중정형(中庭形) 가람이다. 대웅전 좌측으로는 명부전을 시작으로 나한전·칠성각·독성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12종 36점의 성보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이들 유물들은 모두 16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귀중한 작품들이다. 그 외에도 진관사에는 근대불교의 대강백(大講伯, 경전 강의를 잘 하는 스님)인 탄허스님의 친필을 포함한 많은 성보들이 있다.

최근 진관사는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유는 지난해 5월 진관사 칠성각 해체복원 조사 중 불단과 기둥의 해체 과정에서 태극기가 발견됐고 발견 이후 보존처리를 거치고 전문가들의 연구와 고증을 통해 ‘이 태극기’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료로 매우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는 일장기에 위에 덧그린 것으로, 일장기를 거부하고 일본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에서는 이 소중한 자료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14일까지 박물관 1층 특별전시장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에는 태극기 발견 당시 태극기에 감싸였던 <신대한> 3점, <독립신문> 4점, <조선독립신문> 5점, <자유신종보> 6점, <경고문> 2점 등 5종 20점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수륙도량인 진관사에서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 등의 혼령들에게 불법(佛法)을 강설(講說)하고 음식을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륙재(水陸齋)가 매 윤년·윤달에 크게 열린다.

또한 연중 특별기도법회와 매월 음력 초하루부터 초삼일까지 신중기도, 매월 음력 18일 지장재일에는 지장재일기도, 매월 24일 관음재일에는 관음재일기도가, 매주 일요일에는 가족법회가 열린다. 또한 대웅전 천일 관음기도, 백일 관음기도, 입시기도 등이 계속 진행 중에 있다. 진관사의 신행단체로는 매주 일요일 가족법회를 중심으로 원융회·아버지회·묘음합창단, 중ㆍ고등부회·어린이회가 법회와 더불어 봉사활동·수련회·특활활동 등 각 단체별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진관사에서는 불교도로서 보다 체계적인 교학의 이해와 신행활동에 필요한 내용의 습득을 위해서 봄·가을로 기초교리강의와 2년 4학기제의 진관사 불교대학을 주간반과 야간반으로 나누어 지도하고 있다.

불교대학 강의 내용은 불자의 근기 갖추기, 보살행의 실천, 불교문화, 천수경의 세계, 금강경의 이해를 다루고 있으며 주간반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야간반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강의한다.

비구니스님들의 단아한 수행처인 진관사는 북한산 국립공원내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더불어 현대를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일상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오늘도 부처님의 자비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 진관사에서 발견된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극기. (사진제공: 서울역사박물관)

◆고찰 진관사 천년의 역사

진관사(津寬寺)는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현종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진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해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각 30칸, 청풍당(淸風堂)과 명월요(明月寮)가 각 10칸, 제운루·정재소·일주문·해탈문·종각·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됐다.

또한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했다. 현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경법회(落慶法會)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까지 책봉했다.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임금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

1090년(선종 7년) 10월에 선종(宣宗)은 진관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성대하게 봉행했으며, 1099년(숙종 4년) 10월에는 숙종(肅宗)이 진관사에 친행했고, 그 후 1110년(예종 5년) 10월에는 예종(睿宗)이 진관사에 순행하는 등 역대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됐다.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권근(權近)이 지은<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진다.

1397년(태조 6년)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된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된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적으로는 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도 겸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절에도 행차하였으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했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水陸齋)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은 모두 59칸으로 상·중·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중·하단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과 규모를 갖추게 된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1413년(태종 13년)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됐으며, 국찰로서 자리매김하게 됐다.

세종 때에는 1421년(세종 3년)에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 시켰다. 그리고 세종은 1442년(세종 24년)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신숙주·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했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 국민의 사찰로 확대됐다.

또 1452년(문종 2년)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1463년(세조 9년)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어 피해를 입게 됐다. 그 후 1470년(성종 1년)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854년(철종 5년)과 1858년에 중수되었으며, 1879년(고종 16년)에는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됐다.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운(慶雲)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改金;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함)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시왕탱화 등을 개금ㆍ보수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의 자원으로 쓰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근대기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일신(一新)한 진관사는 1950년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 진관사 태극기가 발견된 칠성당 모습(현재 모습은 복원된 칠성당). ⓒ천지일보(뉴스천지)

◆진관스님, 폐허된 진관사 재건

이에 폐허 상태에 있던 진관사는 1963년 현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스님)이신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발원(發願)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진관(眞觀)스님은 1965년에 현재의 대웅전(大雄殿)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三尊佛) 을 조성했으며, 1967년에 후불탱(後佛幀) 및 신중탱(神衆幀)을 조성해 진관사 주법당(主法堂)을 여법(如法)하게 일신했다. 또 1968년에는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해 1969년에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했으며 1970년에는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하고 1972년에 나가원(那迦院)을 신축, 1974년에 범종(梵鐘) 조성, 1975년 동정각(動靜閣) 신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옛 가람(伽藍)의 자취를 찾는 여법한 가람이 복원됐다.

또한 진관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사회복지와 포교 활동을 통해 실현하고자 1996년에 진관사 부설 포교당인 보현정사와 코끼리유치원을 신축했으며 2007년 9월에 사회복지법인 진관 무위원을 설립해 지역사회 복지증진을 위한 또 다른 장을 열었다.

진관사에서는 수륙사가 건립된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두 번 국가행사로서 수륙재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후 태조의 재뿐만 아니라 조선왕실의 모든 재가 이곳에서 올려지게 된 것은 그와 조선왕실이 불교를 통해 항상 보호받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견암사와 관음굴 등에서도 수륙사를 중심으로 국가적 수륙재가 봉행됐지만 진관사는 적극적인 국가적 후원을 배경으로 수륙도량 중에 가장 번성했던 사찰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지금의 진관사 회주이신 진관(眞觀)스님이 주지로 부임해서 과거의 수륙재를 복원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82년 자운율사스님의 증명하에 수륙재를 복원해 이후 매윤년·윤달에 진관사 수륙재를 봉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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