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일 이른 아침 아우내 장터의 함성

▲ 유관순 열사(사진제공: 독립기념관)
“나의 이번 거사는 우리 겨레의 얼을 확실히 펴기 위한 것입니다. 동포들이여, 나를 따라서 일제침략자를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냅시다.”

[뉴스천지=유영선 기자] 3000여 명의 시위군중 사이로 한 여성이 직접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자주 독립 쟁취를 위한 연설과 함께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장터는 시위 군중들의 만세소리로 진동했다.

위풍당당하게 시위군중 앞에 선 그는 용맹스러운 사내가 아닌 가냘픈 19세의 여성인 유관순 열사였다.

유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부친 이중권 선생과 모친 이소제 여사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특히 유 열사 본인뿐 아니라 부모도 4월 1일 아우내장터서 열린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순국해 명실공히 애국 충절의 집안으로 정평이 나 있다.

또한 유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 선생도 만세운동 중에 부상을 당하고 체포돼 공주구치소에 수감됐다.

어린 시절 유 열사는 성경구절 한 번 들으면 줄줄 외울 정도로 두뇌가 명석해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선교사의 눈에 띄어 191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비생으로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 열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등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해 3·1절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그 후 학교가 휴교되자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와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 등을 찾아다니며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음력 3월 1일에 총궐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종용해 거사를 치룰 약속을 얻어냈다.

거사일을 하루 앞둔 3월 31일 자정, 밀약한 동지들에게 거사를 알리는 신호탄인 횃불이 용두리 뒷산 매봉산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마침내 4월 1일 아우내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3000명이 넘는 군중들로 가득 찼다.

 

▲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을 당시의 유관순 열사(사진제공: 독립기념관)

이날 아우내독립만세운동에서 일본헌병의 무자비한 탄압에 유관순 열사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유 열사는 아우내만세시위의 주동자로 체포돼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받게 됐다.

유 열사는 1심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후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해 최종 3년형이 확정됐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에서도 그는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 동료를 격려했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다.

모진 악형 속에서도 자주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던 유 열사는 일제의 계속되는 고문과 체포 당시 입었던 상처가 심해져 옥중에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1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유 열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사)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류근창 회장은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계승돼야 하는데 이 부분이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유 열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을 수 있도록 정부와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펼쳐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은정(유관순열사기념관) 학예사는 “올해 3‧1절 기념행사로 치러진 ‘아우내 봉화축제’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성황리에 치러졌다”면서 “이전 행사완 달리 헌다래 차를 우려내 호국영령들에게 바치는 부대행사가 열려 볼거리가 풍성했다”고 말했다.

또 김 학예사는 항간에 떠돌았던 여섯 토막이 난 유 열사의 시신에 대해 “60~70년대에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자극적으로 영화를 만들다 보니 말이 와전된 것”이라며 “유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서 온전한 상태로 인계받아 장례를 치렀다”고 설명했다.

▲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할 당시의 유관순 열사(사진제공: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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