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돼 수많은 종교가 한 데 어울려 살고 있는 다종교 국가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부터 한반도에서 자생한 종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각 종단들은 정착하기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박해와 가난을 이기며 포교를 해왔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종단들의 성지가 됐다. 사실상 한반도는 여러 종교들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에 본지는 ‘이웃 종교 알기’의 일환으로 각 종교의 성지들을 찾아가 탐방기를 연재한다.

 

 

 

 

 

 

 

 

 

국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본당
기공 12년만에 완공된 건물
고딕양식… 문화적 가치 높아 

성당 제대 하부에 지하묘역
기해·병인박해 순교자 안치
신도들, 지하성당서 고해성사 

 

▲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명동대성당.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한 달 평균 약 150만명의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핫 플레이스’인 서울 명동. 매일 고층 빌딩 사이로 오가는 인파들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관광객과 시민들로 명동거리는 북새통을 이룬다. 그런데 이곳에 천주교의 본산이자 상징인 ‘성지’가 있다는 사실. 바로 ‘명동대성당’이다.

▲ 한 달 평균 약 150만명의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핫 플레이스’인 서울 명동. ⓒ천지일보(뉴스천지)

추석을 코앞에 두고 훌쩍 다가온 가을을 시샘하듯 낮 동안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 9일 명동대성당을 찾아갔다.

유네스코길을 따라 고층 빌딩과 인파들을 비집고 오르막길을 걸어가자 널찍한 대지에 고풍스러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천주교 본산 ‘명동대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비가 온 후라 공기는 맑았고, 파란 하늘은 뭉게구름을 안고 있었다. 명동대성당의 위용을 자랑하는 십자가 종탑 위로는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성당은 기도하러 온 신자들과 관광객들로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고딕 양식 돋보이는 천주교 본산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으로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딕 양식 건축물(사적 제258호)이다. 기공 후 무려 12년만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성전 건물 외관은 장식적 요소가 배제된 순수 고딕 양식으로 건물이 지어졌다. 반면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아치형 복도, 스테인드글라스 등 외부와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생애, 성탄과 삼왕 경배, 예수와 12사도 등 성서의 내용이 표현돼 엄숙하고 경건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곳곳의 제대, 성화, 성상 등 종교 예술품들은 명동대성당의 종교적·미술적 가치를 더했다.

제대로부터 출입구의 파이프 오르간에 이르기까지 아치형으로 길게 이어진 성당은 내부의 소리를 웅장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때마침 성가곡을 녹음하러 성당을 찾은 어린이 찬양대의 맑은 미성이 울려 퍼졌다. 아치형으로 높게 뻗은 천정은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굴려냈고, 지나가던 관광객들의 발걸음까지 사로잡았다. 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하던 신자들의 귀에는 이 소리가 마치 천사의 속삭임 같지 않았을까.

▲ 명동성당의 제대 뒤의 묵주기도 신비 스테인드글라스로 묵주기도 환희·고통·영광의 15가지 신비를 표현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순교자 유해와 함께 신앙하는 천주교인

명동대성당은 1883년경 당시 교구장 블랑 주교가 종현 일대의 대지를 구입했고, 1892년(고종29년) 8월 5일 블랑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Mutel) 주교가 정초식을 가지면서 한국 교회를 위해 일했던 주교와 선교사·은인들의 명단을 머릿돌 밑에 묻고 머릿돌을 축성 기초했다.

성당 건축은 1896년 2월 완공됐고, 1898년 5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바로 종현성당(鐘峴聖堂)으로 한국 최초의 본당(本堂)이 됐다.

▲ 한국 교회의 수호자로 추앙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상’이다. 1948년 명동성당 축성 50주년을 맞이해 성당 뒷마당에 설치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신자들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명동대성당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다. 2000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됐다고 알려졌다.

그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이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명동성당 내부의 ‘십자가의 길’제6처. ⓒ천지일보(뉴스천지)

성당 제대 하부에 위치한 지하성당은 미사 장소와 성해 안치실로 쓰이는 곳이다. 지하 묘역이라고도 불린다. 성당 건립 초기에는 아홉 개의 제대가 있었지만 현재는 두 개뿐이다. 이곳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돼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역시 기해박해 때 순교하고 1984년 시성된 성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5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의 푸르티에 신부 및 프티니콜라 신부의 유해와 1839년 순교한 무명 순교자 2인의 유해도 모셨다. 신도들은 이곳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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