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직단 남신문에서 바라본 풍경 ⓒ천지일보(뉴스천지)

“풍년 들게 해 주시옵소서,
비 오게 해 주시옵소서”
땅·곡식 신께 제사 올려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사와 직이시여, 풍년 들게 해 주시옵소서, 비가 오게 해 주시옵소서.”

조선시대, 왕은 이곳 사직단(社稷壇)에서 울며 기원했다. 극심한 가뭄에 바짝바짝 말라버린 농작물. 백성들의 배고픔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런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왕은 빌고 또 빌었다. 왕의 울음소리에 중신도 백성도 구슬프게 울었다. 울음으로 응집력을 쌓은 선조들. 왕은 기우제를 올렸고, 신기하게도 얼마 후 비가 왔다. 오늘날 생각해보면 제사를 지낸다고 하늘에서 비가 떨어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직단의 존재 이유였다.

수백 년이 지난 현재. 장엄했던 사직단은 일부만 남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낮은 담장 너머로 왕은 만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 안을 들여다보자.

▲ 담장너머로 보이는 사직단. ⓒ천지일보(뉴스천지)

◆유교 예법 따라 지어져

서울 인왕산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사직단은 유교의 예법에 따라 1395년 지어졌다. 유교 경전인 ‘주례’에 따르면, 국가의 도읍지에는 반드시 세 곳의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왕이 머무는 궁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다.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지었다.

사직단의 동쪽에는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단(社壇)을, 서쪽에는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직단(稷壇)을 배치했다. 단의 형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 의해 네모난 방형으로 돼 있다.

주위에는 ‘유(壝)’라 불리는 낮은 담이 있다. 그 밖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시 둘레담이 있다. 유와 둘레담에는 각각 사방의 중앙에 ‘홍살문’이 있고, 둘레담의 북문만 삼문(三門)으로 돼 있다. 또 그 외부에는 제사 준비를 위한 부속 시설을 뒀다.

▲ 사직단 북신문 ⓒ천지일보(뉴스천지)

태조 때 사직단에서는 4개의 대제(大祭), 중제(中祭), 풍년기곡제(豐年祈穀祭), 기우제(祈雨祭), 천신제(薦新祭),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백성은 땅과 곡식 없이 살 수 없으며, 사직은 풍흉과 국가의 운명을 관장한다고 믿었던 만큼, 제(祭)는 매우 중요했다.

앞서 우리나라는 신라 선덕왕이 783년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세웠다. 그 뒤 고려 성종, 조선 태조 때 각각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두 단만 남은 사직단

이 같은 사직단의 운명은 기구했다. 경술국치(1910년)로 사직단은 두 단만 남은 채 사직공원으로 바뀌었다.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 정책’ 때문이다.

사직단에서 임무를 관장하던 사직서(社稷署)도 폐쇄된다. 제례양식도 폐지됐다. 국가의 정신적 기둥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사라진 셈이다.

사직단 주변에는 도로가 조성됐고, 공원을 조성하는 부속건물이 세워졌다. 이로써 인왕산 자락에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사직단은 그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다.

▲ 사직단 정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사직단의 부속 건물 중 현재 남은 건물은 안향청(安香廳)과 정문이다. 안향청은 재궁으로 사용된 사직서의 중심 건물이다.

정문은 원래 위치에서 14m 뒤로 옮겨진다. 해방 후인 1962년 정부의 ‘도시 계획’으로 인해서다.

사직단은 1963년 사적 제121호로 지정되면서 1980년대에 담장과 부속 시설 일부를 복원했다. 1988년부터는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서 사직 대제를 매년 거행하고 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600년을 버텨온 사직단. 하지만 여전히 ‘악공청’ 등 부속건물은 깊은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있다. 그날을 위해 인내하고 있는 듯 사직단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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