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거리 편의점 앞

정 령

여기는 당신이 자주 드나드는 사거리 편의점 앞입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면 배가 간질거립니다
간질거리는 문장으로는 성이 안 차 얼른 오라고 손을 흔듭니다
어깨가 축 처진 당신이 편의점에서 사온 커피를 마시며 직장을 잃었다고 할 때도 등만 대주었습니다
당신이 직장은 또 구하면 된다고 말할 때도 고개만 끄덕여 주었습니다
이사를 결정한 당신이 떠난다고 말해주었을 때도 가만히 듣기만 했습니다
편의점 앞은 당신이 던진 빈말들로 너덜거립니다
당신의 빈말들을 주워 모은 편의점 앞은 여전히 들어오고 나가고 다시 나가고 들어오고 발자국만 성성합니다
당신이 떠나고 난 자리에 비둘기 한 쌍 날아오릅니다

[시평]

동네 사거리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이다. 그래서 이런 곳에는 으레 사람들이 자주 이용을 하는 가게가 있기 마련이다. 시인이 사는 동네의 사거리에는 편의점이 있는 모양이다. 편의점, 서민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을 사는 그러한 가게. 이 편의점은 ‘당신’ 역시 자주 드나들면서 이것저것도 사고, 또 때로는 커피도 사서 마시던, 그런 곳이었다.

직장을 잃은 날에도, 이 사거리의 편의점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축 처져서는 풀 죽은 목소리로 ‘나 오늘 사표를 냈어’ 기어들듯이 말할 때도, 다만 등이나 대주며 따뜻한 말 한마디도 못한, 그 자리. 또 새로 직장을 얻어 그 기쁨을 들뜬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도, 이사를 결정하고 떠난다고 말을 할 그때도, 다만 들어만 주던 그 자리, 사거리 편의점 앞.

당신은 떠났어도, 당신이 던져주었던 그 말들이 떨어져 있는 듯한 그 편의점으로는 여전히 사람들이 들어오고 또 나가고, 다시 들어오고, 오늘도 사람들의 발자국들만 성성하구나. 당신이 떠나고 난 그 빈자리, 지난 우리의 모습인 양 다정히 구구대며 모이를 쪼던 비둘기 한 쌍, 문득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는 오늘, 오늘 당신이 더욱 보고 싶구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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