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록(95) 범민족화합통일본부 총재. ⓒ천지일보(뉴스천지)

초대 민선 지사, 4선 의원 출신
손기정 기념탑에 ‘KOREA’ 새겨
군부 탄압에 컨테이너서 36년
명예회복 아직 못 받고 있어
95세 원로, 굴곡의 정치사 ‘생생’ 
한일협정 국회 비준 현장서 ‘분노’ 
“제2의 을사늑약… 협정 무효 선언” 
의사봉, 광화문 네거리에 내던져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박영록(95) 범민족화합통일본부 총재는 대한민국 정치사의 산증인이다. 초대 민선 도지사와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원로 정치인이자 평생 나라와 민족을 잊어본 적이 없는 애국자의 표상이다. 1970년 독일 베를린 방문 당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의 올림픽 승리자 기념탑에 새겨진 손기정 선수의 국적표시를 ‘JAPAN’에서 ‘KOREA’로 바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한국 지도자들의 무관심으로 지금 이 기념탑의 ‘KOREA’는 다시 ‘JAPAN’으로 되돌려진 상태다.

박영록 총재는 신군부 정권의 탄압으로 ‘의원 배지’와 전 재산을 빼앗긴 뒤 2평 남짓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청원이 올해 국회를 통과했지만, 박 총재에겐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일 뿐이다. 아직 정부로부터 어떤 실질적인 명예회복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총재는 국회의 청원 처리 권고에도 불구하고 굼뜬 행정부에 대한 행정심판을 청구한 뒤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박 총재는 만난 것은 지난 7월 초순경 헌정회관에서였다. 왜소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9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올곧은 기개는 대단했다. 기자와 마주한 박 총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한국 정치사를 술술 풀어냈다. 해방 운동과 광복 직후 시대 상황, 군사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그가 겪었던 정치 역정이 생생했다. 특히 친일파 청산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의 강도가 더욱 높아졌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고는 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는 이야기를 그는 수차례 반복했다.

◆김·오히라 메모 사건에 분노하다

박 총재는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의 굴욕적인 외교 사례로 ‘김·오히라 메모’ 사건을 꼽았다. 김·오히라 메모는 지난 1962년 11월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상이 대일청구권 문제를 합의하면서 교환한 비밀 합의 각서다. 이 메모엔 유상 3억, 무상 3억 달러 제공에 대한 합의사항이 담겼는데, 나중에 폭로되면서 국민적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협상 테이블에선 독도 영유권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이때 김 부장이 ‘독도는 갈매기가 와서 똥이나 싸고 가는 쓸모없는 바위섬’이라고 해 독도 영유권 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게 박 총재의 주장이다.

한일협정 이후 국회 비준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 김·오히라 메모의 존재는 일본 신문엔 났지만, 한국 신문엔 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국회에서 야당 간사를 맡았던 박 총재는 이 메모 내용을 입수했다. 메모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박 총재는 특위에서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원장 민○○이라는 놈이 눈치 채가지고, 아 저놈(박 총재)이 김·오히라 메모를 파헤치려고 한다. 만일 김·오히라 메모가 세상에 알려지면 국민이 전부 불같이 일어나가지고 데모하고, 야단이 난다고 해가지고 이놈이 회의하다 말고 일어나더니 ‘모든 질의, 토론 다 생략하고 통과된 것으로 선포합니다’ 하고 방망이를 탕탕탕 쳐버리는 거야.”

박 총재는 황급히 의사봉을 빼앗았지만, 이미 늦었다. 목적을 달성한 여당 의원들은 물론 속기사들도 회의장을 떠났다. 야당 의원 몇 사람과 박 총재만 남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친일파가 강제로 통과시킨 한일 비준협정은 광복된 조국을 다시 일본의 경제 식민지 노예화하려는 망국적인 제2의 을사늑약과 같으므로 나는 민족의 이름으로 이 협정이 무효임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박 총재는 한일협정 비준안을 통과시킨 의사봉을 국회가 있던 광화문 네거리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 지난 1970년 8월 15일 당시 박영록 신민당 의원 부부가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기념탑의 손기정 국적을 ‘JAPAN’에서 ‘KOREA’로 고친 뒤 유학생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제공: 박영록 총재)

◆친일파가 이순신을 죽였다

그의 이야기는 친일파 청산 문제로 옮겨갔다. 우리나라 정치·문화 저변에 깊숙이 뿌리내린 친일 잔재를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박 총재는 한평생 친일 청산을 위해 살아 왔다. 여생도 이 일에 힘을 쏟겠다는 각오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일대기를 영화로 제작하겠다며 찾아온 한 영화감독에게도 대뜸 친일 청산 문제를 꺼냈다.

“여러분 말이지, 이순신이 일본 놈과 싸우다 죽었다는 전제 하에 역사를 바로 잡으려 하면, 그것은 헛된 일이고 역사를 잘못 보는 거요. 이율곡, 이순신은 일본이 잡은 게 아니라 우리나라 친일파가 잡은 거요.”

무슨 말인가. 우리가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이순신 장군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서 전사하지 않았던가. 그의 설명은 계속됐다.

“우리나라엔 사색당쟁이란 게 있어. 이북에선 함경도, 평안도, 남쪽에선 전라도, 경상도로 나뉘어가지고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민족과 역사는 온데 간데 없어. 정치 욕심이 돼가지고, 싸우다 보면 나라가 절단 나는 거지.”

그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렇다. 임진왜란 직전 당시 사색당쟁에 매몰된 정치권에서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묵살하는 친일 행위로 일본이 쳐들어오게 하고, 이순신이 이 일본과 싸우다 죽었으니 결과적으로 친일파가 이순신을 죽인 것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오늘날 상황도 임진왜란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 일제 강점기 이후 친일 청산에 실패하고 친일파가 득세한 상황이 그때와 같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정치가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지름길로 박 총재는 무엇보다 ‘친일 청산’을 우선으로 꼽는다.

▲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한 주택가 골목에 있는 박영록 총재의 컨테이너 집. 박 총재는 1980년 신군부의 탄압으로 의원직과 전 재산을 빼앗긴 뒤 컨테이너에서 36년 동안 생활해 오고 있다.

◆2평짜리 컨테이너로 몰아넣은 군사정권

기개 높았던 야당 정치인 박영록은 정권의 집중 표적이 됐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박 총재가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역의원이었던 그를 영장 없이 강제 연행해 47일 동안 구금했다. 정치포기각서와 의원직 사퇴서를 받기 위해 가혹행위를 하고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까지 몰수했다. 이후 박 총재는 2평짜리 컨테이너에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지난 2월 국회 안전행정위원회는 박 총재 명예회복을 위한 국회 청원안을 처리했다. 내용은 ‘국가가 박영록과 가족에게 사과하고 피해에 대해 적절한 구제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박 총재는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거나 재산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박 총재는 자신에게 사과해야 할 주체도 국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데, 국가가 뭘 잘못을 했다고 내게 사과를 하는가. 국가는 내게 사과할 잘못이 없다.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국가를 팔아가지고, 나에게 이렇게 했으니, 사과를 시키려면 전두환이를 시켜야지, 이 민주화된 광명천지 아래서 그를 고대광실에 앉혀놓고 대한민국이 대신해서 내게 사과를 한다? 이런 사과를 받아야 하는가 말이다.”

박 총재는 언론에도 쓴소리를 던졌다. “국회서 정부가 사과하고 재산 돌려주라고 하는데, 이들이 안 돌려주고 수수방관하고 있어. 국회가 민권의 최후 보루라고 하면 하늘의 결정이나 마찬가지인데, 뻗대고 있고… 이게 무슨 나라인가. 언론도 사설 쓰고 해야 할 판인데, 전부 침묵들 하고 있으니….”

◆박영록은 누구

1922년 강원도 고성 태생인 박 총재는 38세 때인 1960년 제11대 강원도지사를 지내고, 제6대, 7대, 9대, 10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평민당 부총재와 민주당·신민당 최고위원 등 정치권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0년대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철승 전 의원과 더불어 ‘40대 기수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2007년엔 ‘대한민국 청렴정치인 대상’을 수상했으며, 상금 1억 원을 전액 사회운동에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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