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갑자기 하늘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유리알처럼 맑고 파랗다. 끈질기게 사람을 괴롭히던 더위는 온 데 간 데가 없다. 가끔 불볕 쏟아지는 지표면을 낮게 휘감던 먹장구름도 사라졌다. 계절의 파노라마는 쉼 없이 전변한다. 그것이 더운 여름 끝에 당장 새롭게 펼쳐 보이는 것은 파란 하늘과 그 하늘 천정에 높이 깔리는 양털구름, 먼 산 위에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이다. 자연이 드러내는 이 ‘조화(造化)’와 변화무쌍한 징표가 말해주는 뜻을 우리는 되풀이되는 경험을 통해 직감한다. 바로 가을이다. 또 가을인 것이다. 피부로 느끼기에도 날씨는 청명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그렇다고 물론 계절이 여기서 멈추지는 않을 것이지만-. 

파란 하늘이 나타난 것은 눈 깜박할 사이의 변화였다. 집집마다 건물마다 없는 곳이 없는 그 무수한 에어컨(air conditioner)의 찬바람이 위력을 발휘해 더위를 몰아낸 것이 아니다. 불티나게 팔린 청량음료와 아이스크림, 팥빙수와 시원한 맥주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사히 더위를 견디게 한 것도 아니다. 끈질기던 더위를 간단히 물러나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神)의 ‘한 수’에 의한 것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방도가 없다. 그것도 갑작스런 변화를 일구어냈기에 전혀 힘들이지 않은 ‘작위(作爲)’, 가벼운 ‘일거수(一擧手)’에 의한 것이었다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가지(不可知), 불가시(不可視)의 영역이다. 그 ‘조화’를 정확히 말하는 것은 사람의 분수와 능력을 뛰어넘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말할 것 없이 올 여름 혹서(酷暑)는 유난히 길고 유별났다. 참기 어려웠다고 실토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북극과 남극의 빙하를 녹아내리게 함으로써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을 물에 잠기게 하는 지구의 기상이변과 그것으로 인한 재앙을 본격적으로 모두에게 체감하게 해주는 살인 더위였을 수도 있다. 지구 곳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다. 예측 기술과 능력이 모자라서인지 아니면 날씨의 변덕이 워낙 심해서인지 사람들의 ‘의존(依存)’이 갈수록 커지는 기상청의 기상 예보는 빗나가기 예사였다. 아마 그로부터 오는 비난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부채나 선풍기만으로 더위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편안한 생활에 젖어 체질이 약해졌다거나 사치스러워졌다고 힐난만 하기는 어려워졌다고 볼 수도 있다. 기상청이 자꾸 오보를 내긴 했지만 예로부터 천문 및 기상 관측은 치국(治國)과 경국(經國)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국책 과업이었다. 동시에 중요한 실용 학문이기도 했다. 현 시대에 와서도 역시 본질에서 달라진 것이 없으며 달라질 이유도 없다. 

그렇기에 각국은 예보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천문 및 기상 연구에 경쟁적으로 재원을 쏟아 붓는다. 우수 인력을 길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꾸만 성능이 더 좋아지는 슈퍼컴퓨터를 도입해 활용하며 첨단 기상 레이더를 늘리고 해상에는 가상관측선, 우주에는 기상위성 등을 띄운다. 이렇게 투입되는 재원, 즉 인풋(input)에 맞는 아웃풋(output)이 꼭 뒤따르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투자를 망설이지 않는 셈이다. 그만큼 기상 정보가 중요하며 중요해졌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더구나 문명이 찬란해져 사람들의 활동성과 유동성, 이동성은 극으로 치닫는다. 그 하나하나가 기상정보 없이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일반인에게 기상정보는 매일 챙겨보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소중한 생활정보가 아닐 수 없다. 일반인에게뿐이랴. 기상은 민심을 변하게 하며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정치의 유연성과 변화다. ‘날씨 정치’라고나 할까, 뭐 그렇게 말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비단 정치뿐이 아니고 경제 산업 활동 전반과 심지어 군사작전에 이르기까지 날씨에 좌우되지 않고 날씨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의 활동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형편이 이렇다면 기상청은 무슨 특별한 작용이 없어도 사필귀정으로 본래 지니고 있던 가치 그대로의 위상과 인식을 스스로 또 저절로 회복해가는 것이 된다. 기실 정부기관 간에 벌어지기 마련인 역학적 갈등의 속성으로 보아 불가피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았어야 마땅한 기관이 공리공론과 권력 놀음에 치어 변방에 방치돼 왔다. 지금이라도 ‘오보청’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대신 정확한 관측과 예보의 서비스를 향유하기 위해 자구노력을 부추김과 함께 소기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적합한 환경을 마련해주는 일이 시급하다 할 수 있다. 그것이 국민과 국가에 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 일류 국가로서의 품격과 내실을 다져나가는 길이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정한 천문 및 기상 조건과 그 규칙성이 있어야만 살아가는 생명체다. 그 질서가 무너지면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그 질서는 인간 생존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렇기에 천문 및 기상에 관한 연구와 관측, 또는 그 변동을 알아맞히는 일은 영속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이래서 신화의 스토리는 픽션(fiction)이지만 스토리의 바탕은 항상 사실적 가치(value)를 거스르지 않는다. 예컨대 환웅(桓雄)천왕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펼칠 때 각각 바람 비 구름을 관장하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왔다. 고려의 승(僧)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전하는 내용이다. 긴 설명을 늘어놓을 것 없이 기상 관리가 치세의 최우선 전제임을 보여주는 민족 신화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그 가치가 무엇이 달라졌는가. 도리어 올여름 혹서로 겪었듯 기상 이변과 재앙에 관한 공포가 더 절실해지는 마당이어서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글자의 뜻으로 24절기 중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處暑)가 지나자 정말 여름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도대체 다른 계절에 절대로 길을 비켜주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이었다. 너무 덥다고 여름을 원망했던 것이 부질없고 얄팍했다. 그 여름이 갔으니 아까운 세월만 또 어디로 허망하게 날아가 가버린 꼴이 됐다. 그렇긴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은 건졌다. 걱정되는 기상 이변이나 날씨의 변덕이 천문과 기상의 질서를 아주 망가뜨린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청명한 가을하늘이 이렇게 엄연하게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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