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항주의 오산(吳山)은 성황산(城隍山)이라 한다. 과거에 산상에 성황묘가 있었다. 원래 성황노야는 손본(孫本)이었으나 명의 영락(永樂) 연간에 주신(周新)으로 바뀌었다. 주신에 관한 사적은 옛날 희극에 등장하는 송대의 명판관 포청천과 유사하다. 탐관오리가 불법을 자행할 때, 주신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 신화적 존재로 변했다. 점차 신나는 이야기가 첨가되면서 죽은 후에 절강 지방의 신이 됐다. 사람들은 성황노야를 찾아가 소망을 빌었다. 고사와 전설은 당연히 과장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백성들의 희망이 들어 있다.

주신은 광동 남해인으로 영락 원년인 1403년 감찰어사가 됐다. 강직했던 그는 아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황제의 친척이나 고관들에게 기탄없이 직언을 퍼붓는 그에게 사람들은 냉면한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요즈음 말로 얼굴에 출판을 깐 사나이라는 의미이다. 성조 주체는 그를 깊이 신뢰했다. 주신은 1405년에 안찰사가 되어 절강에 부임했다.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한 그는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정확하게 가려 주었다. 주신은 늘 평복을 입고 다녔다. 한 번은 현관이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말을 듣고 친히 살피러 갔다가 체포됐다. 옥중에서 죄수들을 통해 현관의 불법행위를 자세히 밝혀냈다. 다음 날 현관은 안찰사를 마중하려고 성문까지 나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찰사가 도착하지 않았다. 그 때 주신이 옥리에게 자기가 바로 주신이라고 알려 주었다. 주신은 현관을 파직하고 죄를 물었다. 

1412년, 절강에 수재가 발생했다. 주신은 즉시 피해상황을 보고하고 부역과 세금을 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주신은 매우 청렴했다. 아랫사람이 구운 오리고기를 보냈다. 주신은 그것을 대문에 걸어놓고 가난한 집에서 자란 자기는 오리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물을 보냈던 사람은 부끄러워서 주신의 집을 찾지 못했다. 거절한 주신이나 부끄러워 한 그 사람이나 훌륭한 인품이 돋보인다. 엄청난 금품을 주고받고도 대가성이 있느니 없느니 왈가왈부하면서 오로지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고위층에 대한 잣대는 법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신의 아내 역시도 늘 소박한 옷을 입고 농부의 아내처럼 지냈다. 주신은 여러 가지 억울한 옥사를 해결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얼마 후 성조의 총신이 지휘기강을 파악하기 위해 부하 천호를 절강으로 파견했다. 천호가 못된 짓을 일삼자 주신이 잡아서 혼을 냈다. 귀경한 천호는 주신이 황제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고 무고했다. 황제가 주신을 해임하고 죄를 물었다. 주신은 천호의 죄상을 아뢰고 책임을 물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황제는 오히려 화를 내며 주신을 죽이라고 명했다. 형을 받기 전 주신은 큰 소리로 말했다. 

살아서 직언하는 신하였으니 죽어서는 직언하는 귀신이 되리라!”

주신의 억울한 죽음을 아쉽게 여긴 항주 사람들은 그를 성황노야로 모셨다. 백성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주체는 일부러 자신이 좋은 사람을 죽였다고 한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체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꿈에 주신이 항주의 성황노야가 되어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것이 주신이 절강의 성성황이 된 연유이다. 명말의 장대(張岱)는 이런 시를 남겼다. 

지수지하용봉소(只愁地下龍逢笑) 지금원기미증신(至今寃氣未曾伸)
시름에 젖은 지하의 용은 쓸쓸히 웃으며,
아직도 원기가 풀리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자신의 원기조차 풀지 못한 주신이 왜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황신으로 되살아났을까? 주신이 청렴하게 공직을 수행하면서 백성들을 사랑하고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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