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국체육대학 초빙교수

미국 최고의 권위지 뉴욕타임스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막판 김연아의 기사를 스포츠면 톱으로 연속적으로 다루면서 유독 부담감을 주요 화두로 내세웠다. 줄리엣 매커 기자는 지난달 24일 쇼트프로그램 경기가 끝난 뒤 ‘Pressure Is No Problem for Kim Yu-na(김연아에게 부담감은 문제가 없다)’라는 헤드라인의 기사 서두에서 김연아가 현재 세계챔피언이면서 2년간 세계 최고의 실력을 과시해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부담감을 갖고 참가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매커 기자는 이틀 뒤인 26일 김연아의 금메달 기사에서도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발췌해 “쿨한 여러 달 동안의 훈련을 거치며 올림픽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중압감은 무게로 느껴지지 않았다”며 기사 첫 문장을 시작했다.

뉴욕타임스 기자가 김연아의 부담감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던 것은 부담감이 숨 막히는 경기에서 중요한 승부의 키로 작용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시 세계적 대신문 기자의 탁월한 전문성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김연아의 경기내용을 다시 되돌아보자. 살 떨리는 부담감을 새 깃털마냥 사뿐히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
김연아는 쇼트프로그램에서 강력한 경쟁자 일본의 아다사 마오가 전에 보지 못했던 현란한 연기력으로 엄청난 점수를 받으며 우뢰와 같은 관중들의 박수세례가 이어진 다음 경기에 나서면서도 예술성과 운동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며 마오의 점수를 넘어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프리스케이팅에서는 마오와 김연아의 순서가 뒤바뀌어 김연아가 먼저 힘들이지 않고 현란한 연기력으로 세계최고기록을 경신했다. 부담감 때문인 듯 김연아의 경기모습을 아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마오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김연아는 부담감을 담담하게 딛고 일어섰으나 마오는 부담감으로 오히려 무너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었다.

이번 동계올림픽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서 예상을 뒤엎고 깜짝 우승,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겨준 모태범, 1만m서 행운의 금메달을 차지한 이승훈 등 두 금메달리스트는 오히려 무관심의 설움을 받은 것이 자극제가 돼 발군의 성적을 올렸다. 첫 올림픽 출전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금메달을 따낸 모태범은 국제경기경험이 많고 세계기록에 육박, 메달이 기대됐던 이강석, 이규혁에 비해 아주 홀가분한 기분으로 경기에 나섰다. 성적을 내야 한다는 중압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그의 말마따나 “나를 한번 시험해보자”라는 가벼운 자세로 스케이팅 날을 세워 질주한 끝에 스피드 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이라는 초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

쇼트트랙 선수였다가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환한 지 수 개월도 안 된 이승훈이 첫 올림픽무대 5000m서 은메달을 딴 데 이어 스피드 스케이팅의 마라톤으로 불리는 1만m서 네덜란드 크리머가 코스운영을 잘못하는 실격으로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도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묵묵히 자기 페이스로 역주해 얻어낸 값진 결실이었다.

이에 반해 메달기대로 오래전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이강석과 이규혁은 세계최고의 기량과 기록을 갖고 있으면서도 메달성적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으로 평상시 제 기록조차도 내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큰 경기에 대한 부담감도 스스로 즐기며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최고의 인생을 맞은 김연아,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와 싸우며 경기에 몰입해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한 모태범과 이승훈 등은 이번 올림픽에서 가치 있는 경험을 쌓았던 만큼 앞으로 새로운 경지에서 나름대로 좋은 꿈을 펼쳐 나가기를 바란다. 또 성적을 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경기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이강석, 이규혁 등을 비롯한 불운의 선수들은 이번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더 큰 나래를 펼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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