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

경인년인 올해는 유난히 역사적 사건의 10년 단위 주기가 겹치는 해다. 이를테면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1910년)이 100년이 되는 것을 비롯해 한국전쟁(1950년) 60주년, 4․19혁명(1960년) 50주년,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30주년 등이 이어진다. 이 가운데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더불어 우리 현대사를 살찌우게 한 3대 이정표로 꼽힌다. 이 사건들이 부재했다면 우리는 프랑스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독립전쟁이란 이름의 혁명과정을 거친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선진 외국의 역사와 비교해 초라한 근현대사가 됐을 것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3대 혁명적 사건에서도 가장 먼저 깃발을 올린 동학농민혁명은 그런 의미에서도 매우 소중한 사상적 자산으로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나가야 할 사안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일부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칭하지만 요즘에는 단순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해서 동학혁명이라고도 부르는 게 대세다.

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보면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혁명운동으로 당시의 천도교와 농민들이 주축이 된 한국적 민중혁명이었다. 갑오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반발한 농민들이 동학의 고부접주인 녹두장군 전봉준을 필두로 기병했다가 결국에는 처절한 패배로 끝난 미완의 혁명이다.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내정개혁 요구로 시작된 농민운동이었다가 차후에는 일본에 맞서는 반외세 운동으로까지 진화했다가 30여만 명의 희생자를 낸 채 일본군에 의하여 진압됐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후손들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적멸했거나 신분을 숨긴 채 은신해야 하는 힘든 세월을 살아야 했다. 해방이후에도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탓에 자신들이 목소리를 낼 형편이 못됐다. 다행히 천도교가 명맥을 이어오면서 후손들도 종교에 기대거나 각 지역별로 모임을 만들어 조그만 기념사업 등을 도모해오는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2004년 처음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기 위한 전국적 단체가 결성됐다. 동학혁명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룬 재야사학자 이이화 씨와 유족회를 대표한 정남기(전 언론재단 이사장) 씨 등이 주축이 돼 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결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순수한 민간단체였으나 이 기념사업을 정부보조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참여정부와의 견해가 맞아 떨어져 역시 그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또한 110여 년 만에 당시 희생된 농민군의 유족들이 정부로부터 유족통지서를 받기도 했다.

역시 이 특별법에 따라 기념재단도 정부보조를 받는 문화관광부 산하 정부기관으로 탈바꿈해 올 3월부터 정식으로 새로운 체제로 개편중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왕에 재단을 끌어오던 인사들이 보기에 영 거북스러운 사태가 불거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기념재단의 이사장에 정치적 인사를 앉히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념재단은 올해부터 유족의 등록 심사, 명예회복추진, 기념사업지원 등 모든 사업을 담당하게 된다. 이제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는 기념사업을 총괄할 이사장에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깊은 역사적 인식을 갖춘 사람이 임명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문화부는 동학혁명에는 아무런 조예가 없는 친정부 인사를 이사장으로 앉히려 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던 모 교수를 이사장으로 내정했다고 한다. 이미 방송계와 문화계 전반에 친정부적 인사를 낙하산으로 투하해 갈등을 빚고 있는 문화부가 동학농민혁명 재단마저도 동학혁명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인사를 보은 차원에서 이사장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문화적 폭거 이상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제포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기포했던 갑오년 선혈들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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