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7일 개봉하는 영화 ‘밀정’에서 배우 송강호는 실제인물 ‘황옥’을 모델로 한 ‘이정출’ 역을 연기한다. (제공: ㈜위너브라더스 코리아)

남몰래 사정을 살핌. 또는 그런 사람. 밀정(密偵). 

옆에 있는 동료가 적인지, 내가 적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혼란의 시기인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가 심어 놓은 밀정이 판을 치고 다니는 등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특히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일제의 밀정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라를 잃은 같은 민족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의 경계선에선 사람들은 적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교란했다.

혼란의 시기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이 오는 7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밀정’은 황옥경부사건과 사건의 주동자로 알려진 황옥, 의열단원 김상옥, 김시현 의사의 이야기를 극화해 재구성한 시대극이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김상옥과 김시현, 황옥 세 인물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사건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알아봤다.

상해서 폭탄 제조한 의열단
국내 반입 위해 황옥 등 포섭

일본, 의열단 정체 파헤치려고
황옥에게 비밀 명령 내린 상태

폭탄 수송 중 밀고로 체포당해
황옥, 친일파인지 아직도 모호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이후 의열단은 다른 공작을 세운다. 폭탄을 대량으로 제조해 국내로 반입한 다음 조선총독부 청사와 동척, 매일신보 등에 폭탄을 던져 국내 치안을 교란하자는 것이다. 그간 폭탄의 불발로 인해 수차례 공작이 무산되자 의열단은 폭탄을 직접 제조하기로 한다.

의열단은 1923년 초부터 상해 프랑스조계에 비밀 아지트를 세워 헝가리인 마아잘 라브렌다를 기술자를 섭외해 암살용·파괴용·방화용의 3가지 폭탄을 제조했다. 당시 상해는 임시정부와 여러 나라 사람들의 조계지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본의 감시망을 피하기 좋은 곳이었다.

폭탄이 어느 정도 확보되자 김시현(1883~1966) 의사와 김지섭 의사가 국내에 잠입해 한국인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경부 황옥을 포섭할 계획을 세운다. 김시현 의사는 톈진에서 김원봉·장건상 의사를 만나 다량의 폭탄과 무기를 인수하고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 등을 전달받았다.

그 무렵 일본은 김상옥 의사의 배후인 의열단의 정보를 알아내고 폭탄 제조 시설의 정보를 캐기 위해 조선인 출신 경찰 황옥을 파견한다. 독립군을 많이 체포해서 경기도 경찰부 경부 자리까지 오른 황옥은 마루야마 경무국장으로부터 의열단을 파헤치라는 명령을 받고 장기 병가를 제출하고 중국으로 갔다. 공작 자체가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김시현은 돈을 벌자며 황옥에게 접근했다. 거사를 치르기 위해 대량의 무기를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서다. 김시현의 정체를 알고 있던 황옥도 첩보를 더 얻기 위해 일부러 접근을 받아들인다. 김시현과 황옥은 서로 속이고, 속는 척하면서 엇갈린 첩보전을 벌인다.

이렇게 다른 첩보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김시현은 황옥을 교묘히 안동현 육도만의 어느 여관으로 불러 3일간 감금하면서 포섭한다. 의열단에 다리를 얹은 황옥은 마루야마 경무국장에게 의열단 본부에 잠입한다고 보고하고 2월 24일 프랑스 조계안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접견한 후 폭탄 수송을 맡게 된다.

황옥과 의열단은 폭탄을 무사히 반입하는 데 성공했다. 3월 22일 새벽 6시 열차로 김시현, 황옥, 권동산, 김재진 등은 나머지 폭탄 8개와 권총 5정, 그리고 전단 100매를 가방에 넣어 압록강을 건넜으며 신의주 역전에다 여관을 잡았다. 이후 폭탄과 권총, 전단을 들고 신의주에서 서울행 열차를 탄 김시현과 황옥은 김재진의 밀고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 사건이 바로 ‘황옥경부사건(黃鈺警部事件)’이다.

영화 ‘밀정’에서 배우 송강호가 맡은 ‘이정출’이 황옥, 공유가 맡은 ‘김우진’이 김시현과 같은 인물이다.

▲ 출감 후의 독립의열단원들 기념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황옥 “시킨 대로 했을 뿐”

192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황옥은 복역 중 장결핵과 폐렴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했다. 3년 뒤인 1928년 5월 재수감됐다가 1929년 2월 다시 가출옥했다.

이 사건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그가 위장한 친일파로 의열단에 잠입했던 것인지, 친일파로 위장한 의열단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아직도 남아 있다. 황옥의 공으로 의열단이 폭탄 등 무기를 국내 반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학계에서는 일제가 의열단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벌인 공작이라고 보고 있다.

또 황옥 본인도 1923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저는 일본 경찰 권리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공하면 경시까지 시켜줄 거라 굳게 믿고 시킨 대로 밀정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증언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정치에 발 들인 김시현

10년형을 선고받은 김시현은 1929년 1월 29일 대구형무소에서 풀려나온 뒤 곧바로 만주로 갔다.

이후 변절자 군사간부학교 1기생이었던 한삭평을 처단해 1935년 2월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출소한 뒤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을 전개해오던 김시현은 1944년 다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가 해방하면서 자유의 몸이 됐다.

그는 해방 이후부터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충돌로 한반도 문제가 난관에 봉착해 자주적인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이 어려워지자 정치계에 발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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