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책점’은 오늘날 도서대여점처럼 소설을 빌려주던 곳이다. 재현된 ‘세책점’ ⓒ천지일보(뉴스천지)

이야기 듣던 중 흥분해 살인 벌여
소설 인용해 과거시험 답안 작성
정조 ‘소설 금지령’까지 내려

부녀들 비녀·팔찌 팔아 책 빌려
18세기 소설 전 계층에게 확산
수요 늘자 한글 방각본 소설 등장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서나 역사서라도 중국 책은 절대 가지고 오지 말라.”

1792년 정조(16년)는 ‘소설 금지령’을 내렸다. 성군으로 알려진 정조는 왜 이같이 지시했을까. 당시 온 나라는 소설의 열기에 뜨거웠다. 그 열기가 얼마나 후끈했는지 살인 등 문제점도 발생했다.

◆소설 너무 빠져 ‘살인’ 발생

26일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가 저술한 ‘청장관전서’에 따르면, 옛날 한 남자가 종로거리의 담배 가게에서 어떤 사람이 패사(稗史, 이야기책) 읽는 것을 듣는다. 영웅이 가장 실의하는 대목에서 남자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문다. 그리고 담뱃잎 써는 칼로 패사를 읽던 사람을 찔러 죽였다. 소설을 듣다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이야기꾼을 죽인 것.

이는 당시 독자들이 소설에 얼마나 열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야기 세계와 소설 세계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증거도 된다. 조정에서도 소설 열기는 뜨거웠다. 관원들은 숙직을 하다 몰래 소설을 읽는 일이 많아졌다.

과거시험장도 비상이었다. 과문(科文)에 소설을 인용해 답안지를 작성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국정을 책임졌던 정조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온 나라에 소설의 열기를 잠재우기로 하는데, 급기야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 소설 일체를 들여오지 못하게 ‘소설 금지령’을 내렸다.

◆옛 소설 빌려주는 책대여점 등장

‘책방들은 도심에 모두 모여 종각에서 남대문까지 곡선으로 이어지는 큰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중략) 책방들은 돌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중략) 이 모든 사람들이 서로 떼밀고 다투고 욕하는 중앙광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책방 주인은 그의 가게 깊숙이 웅크리고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모리스쿠랑의 ‘한국서지’의 ‘세책점(貰冊店)’에 대한 내용이다. 소설인기가 높아진 탓일까. 옛 소설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늘어났다. 세책점은 오늘날 도서대여점이나 만화대여점, DVD대여점처럼 다양한 책을 구비해 이를 빌려주고 돈을 받는 곳이다.

▲ 낙서된 세책본. ⓒ천지일보(뉴스천지)

◆모든 계층으로 소설 확산

얼마나 소설 인기가 후끈했으면 부녀자들은 비녀나 팔찌를 팔기까지 했다. 정승인 채제공의 ‘여사서’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내가 보건대, 근래에 부녀자들이 다투어 능사로 삼는 일은 오직 패설을 숭상하는 것뿐인데, 날이 갈수록 더 많아져서 천여 종에 이르렀다. (생략) 부녀자들은 비녀나 팔찌를 팔거나 혹은 빚을 내서라도 다투어 빌려가서 그것으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이처럼 18세기 소설은 중인층에서 하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으로 확산됐다. 사실 이전까지 소설의 독자는 주로 사대부 계층 중심이었다. 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설을 읽거나 필사했다. 심지어 화원(畵員)을 시켜 소설 삽화를 그리게 했다.

◆방각본으로 옛소설 대량 생산

소설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자, 한글 방각본 소설도 등장했다. 방각본은 중국 남송과 북송 때 ‘서방(書坊)·서사(書肆)·서림(書林)’ 등으로 불리던 현재의 상업출판사와 같은 곳에서 이윤 추구를 위해 대량 공급의 목적으로 만든 책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최초로 쓴 방각본 소설은 전남 나주에서 1725년(영조 1년) 나온 한문본 ‘구운몽’이다. 한글 방각본 소설의 정확한 출현 시기는 알 수 없다. 대신 현재 확인된 가장 이른 시기는 1780년대 서울의 방각업체 ‘경기(京畿)’라는 곳에서 간행된 ‘임경업전’이다. 이 무렵 ‘숙향전’, 한글본 ‘구운몽’ ‘장풍운전’ 등도 간행됐다.

유춘동 선문대학교 교수는 “세책과 방각본은 우리나라 출판사와 역사·문화사적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특히 “현재 남아있는 세책본의 대부분은 국내가 아닌 국외에 있다”며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이 자료가 중요한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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