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옥 의사. (제공: 독립기념관)

 

남몰래 사정을 살핌. 또는 그런 사람. 밀정(密偵).

옆에 있는 동료가 적인지, 내가 적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혼란의 시기인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가 심어 놓은 밀정이 판을 치고 다니는 등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특히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일제의 밀정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라를 잃은 같은 민족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의 경계선에선 사람들은 적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교란했다.

혼란의 시기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이 오는 7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밀정’은 황옥경부사건과 사건의 주동자로 알려진 황옥, 의열단원 김상옥, 김시현 의사의 이야기를 극화해 재구성한 시대극이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김상옥과 김시현, 황옥 세 인물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사건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알아봤다.

서울서 4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나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재등총독 암살 계획중 밀고 당해

일본경찰 1000명과 3시간 총격전
끝까지 버티다 마지막 총알로 자결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먼저 살펴볼 인물은 김상옥(1890~1923) 의사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배우 박희순이 연기하는 ‘김장옥’이라는 인물이 김상옥 의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영화 속 김장옥은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전설적인 인물로 자금 확보 작전을 이행하던 중 누군가의 밀고로 발각돼 목숨을 잃었다.

김장옥의 모티브가 된 김상옥 의사 또한 경이로운 역사를 다시 쓸 정도로 의열단 활동에 힘쓴 인물이다. 젊은 청년들이라면 김상옥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 경찰 1000대 1로 싸운 독립운동가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의 애국심과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그가 독립운동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 1919년 11월 9일 만주 지린성의 한 중국인 집에서 조선인 13명으로 결성된 의열단. (제공: 국가보훈처)

◆만세 소리에 독립투쟁 결심하다

김상옥 의사는 1890년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4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덕에 14세부터 말발굽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다. 성인이 된 후 전국을 돌며 장사해 번 돈으로 영덕철물상점을 운영했다. 당시 철물상점은 장래가 밝은 사업수단이었으며, 김상옥 의사는 수십 명의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사업을 번창시켰다.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된 김상옥 의사는 비밀결사 광복단과 말총모자회사를 설립했고, 국민을 대상으로 일본 상품을 배척하는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3월 1일 전국에 울려 퍼지는 만세 소리에 김 의사는 민족에 대한 각성과 앞으로 인생의 목표를 결심한다. 그는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같은 해 4월 1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의 집에서 청년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한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소식과 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실은 ‘혁신공보’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임시정부후원회 취지서와 항일전단을 제작, 배포해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인쇄시설을 압수당하고 김 의사는 체포당했다. 40일간 갖은 고문을 당하고 증거불충분으로 겨우 풀려난 그는 평화적인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껴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을 구상했다.

가장 먼저 북로군정서(중국 만주 소재 독립군단체)에서 파견된 김동순과 함께 비밀결사 암살단을 설립한다. 암살단은 전라도 지역에서 친일민족반역사를 사살한 후 일본 고관 암살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발각당했다. 이 일로 김상옥 의사는 상해로 망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인사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다.

▲ 김상옥 의사가 사용하던 태극기. (제공: 독립기념관)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하지만 선생은 상해 활동과 맞지 않았다. 칩거하며 때를 기다리느니 적극적으로 활동하겠다는 것. 김 의사는 1922년 동지들과 트렁크식 나무상자에 권총 4정과 탄환 8백발, 항일문서를 숨기고 12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은 종로경찰서 폭파와 조선총독 재등실에 목적을 두고 거사를 준비했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일제 식민통치의 본산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목숨을 잃은 곳이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도 독립운동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구금됐던 적이 있다.

그는 동지들에게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남긴 채 1923년 1월 12일 밤 8시께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폭탄이 폭발하며 경찰서는 아수라장이 됐다.

열에 아홉 발을 명중시킨다는 정확한 사격술을 갖춘 김 의사는 동지의 집에 몸을 숨긴 뒤 재등총독 주살을 위해 계획을 추진한다. 하지만 한인 순사 조용수의 밀고로 은신처가 발각돼 1월 17일 새벽 종로경찰서 순사들에게 포위당했다. 김 의사는 치열한 격전 끝에 형사부장과 일본 경찰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피했다. 하지만 은신한 장소에서 1000명의 일본 경찰에게 겹겹이 포위당했다. 김 의사는 인근 가옥 5채의 지붕을 넘나들며 권총과 장총으로 일본 경찰과 접전을 벌였다.

3시간 동안 벌어진 총격전에서 김상옥 의사는 총을 쏘다가 옆집에 들어가 “나 이불 좀 주시오! 이불을 주면 그것을 쓰고 탄환을 좀 피해 몇 명 더 쏘아 죽이고 죽을 터이니”라고 했지만 옆집은 끝내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결국 탄환이 다 떨어지자 총상을 입은 김상옥 의사는 한발 남은 총알을 머리에 겨누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자결했다. 당시 선생의 나이 34세였다. 이후 가족이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몸에는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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