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식을 줄 모르고 대지를 달궜던 무더위가 주말 몇 차례 비가 내린 뒤 한풀 꺾였다. 하기야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가 지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자연법칙은 시기상으로 한 치 오차 없이 펼쳐지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다. 기상청에서는 올해 늦더위가 맹위를 떨칠 거라 예고했고 폭염이 여러 날 계속되다보니 모두가 힘들어했다. 이번 여름과 같은 날씨가 9월초까지 이어진다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인데 생각만 해도 막연하고 아찔하기만 하다.

외부활동하기 좋은 계절이 찾아들고 있으니 은연중 나타나는 게 있다. 정치인들의 바쁜 발걸음이다. 현재 임시국회 개회중이나 사실상 정부 추경안 처리를 위한 원포인트 개회이고, 오는 9월 1일이 제20대국회 첫 정기국회가 시작되는 날이니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정치인들이 국회 원내 3당체계의 이점을 많이 이야기했으니 자칫 파투가 될 뻔했던 추경안 처리처럼 3당체계가 갖는 협치의 장점이 발휘될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띄는 것은 내년 대선에 둥지를 틀 후보들의 행동거지(行動擧止)인데, 주말 신문에 난 사진 한 장이 나의 눈길을 끈다. 평소의 말끔한 차림과는 달리 오랫동안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의 정치인, 이미 언론에서나 국민들 사이에서 여권의 차기지도자 후보군으로 각인된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가 국회 정론관에 나타나 노조와 관련돼 자신의 과거발언에 대한 사과가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도 그렇지만 과거발언에 대해 콜트악기 노조 측에 대한 공개사과이니만큼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시사하는 바가 작지만은 않다.

김 전 대표는 총선 당시 여당 대표로 총선을 진두지휘했으나 여소야대라는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 이후 공식 석상에서 나타나지 않더니만 최근에는 전국 민생 투어를 다녔고, 중국 방문 등 대선을 위한 직·간접의 활동을 재개하고 있는 것 같다. 한때 그는 여론조사기관이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대선후보자 지지도에서 여야 주자 중 상당기간 1위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지난번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친박계가 지도부를 장악하면서 비박계 수장으로 굳어져버린 그의 활동이 정체상태를 맞더니만 다시 부활의 노래를 준비하는 중이다.

비록 종전만큼 못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여권 내 유력 주자다. 여론전문조사기관인 리얼리티가 발표한 8월 3주차 여론조사를 보면 여권에서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24.8%, 오세훈 전 서울시장 5.4%, 김무성 전 대표 4%, 유승민 의원 3.3% 등 10위권 안에서 드는 정치인이 모두 4명이다. 반면 야권에서는 문재인 전 더불어당 대표가 19.2%, 안철수 국민의당 전 상임대표가 9.7%, 박원순 서울시장 5.8%, 손학규 전 더불어 상임고문 4.1%, 이재명 성남시장 3.9%, 김부겸 의원이 2.1%로 보이고 있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는 말처럼 순식간에 급변한다. 언제, 어떤 사유로 지지도가 뒤바뀌고 인기 상승 또는 몰락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김 전 대표는 덥수룩한 수염과 같이 딴 모습을 보이려 절치부심하는 게 아니겠는가.

정권 창출은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차대한 것은 정권 재창출이니 현재 국민지지도에서 야권 유력 후보를 능가할 후보자가 없는 마당에 여권의 고민은 크다. 그래서 새누리당 친박계에서는 올해 말로 임기가 끝나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에게 구애의 손길을 펼친다는 풍문은 그럴듯한 시나리오로 많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는 지금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여권의 다른 주자들, 즉 오 전 시장은 최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논란과 관련해서 “박근혜 정부의 국민통합을 기대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행보”라며 현 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으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높여가고 있고, 김무성 전 대표 또한 다가오는 정치의 계절을 궁리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에 한번 물들인 사람은 그 맛에 매료돼 정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정치 초년생도 그렇거늘 국민이 인정하는 상식선에서 이미 대선후보 반열에 든 정치인일수록 겉으로는 대선이 아직 1년 이상 남아 있고, 당내 경쟁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언행을 매우 조심한다. 겉으로는 대선활동이 아니라고 하지만 속셈은 다르고 물밑에서는 당내 경쟁이나 국민지지도에서 우세를 보이기 위해 갖가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대선후보를 꿈꾸는 정치인 누구에게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정치권력 획득을 위한 정치철학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문에 난 사진 한 장,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가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자신의 과거 발언을 사과하는 모습에서 나의 뇌리 속에서는 이상하게도 ‘날개’가 떠오른다. 올 3월, 관훈토론회에서 “정치의 본질은 권력 게임이다”는 김 전 대표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권력의 생리에 대해 잘 알아야 권력을 다룰 줄 아는 힘이 생기고, 또 권력의 부침(浮沈)을 여러 번 경험한 산전수전(山戰水戰)의 정치인일수록 약자인 국민의 입장을 잘 알 게 될 터에.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하지만 그 날개로 인해 다시 위로 솟구칠 비약의 희망도 함께 있으니 그래서 정치인들이 정치권력의 꿈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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