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상장군 송의를 죽이고 초회왕으로부터 정식으로 상장군의 인수를 받은 항우는 황하를 건너 총공격하여 조나라 거록을 포위하고 있는 진나라군을 깨끗이 괴멸시켜 버렸다. 이제 항우는 명실공히 제후들 사이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위를 확보했다. 

초회왕이 패공 유방에게 함곡관을 넘어 관중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항우도 패공과 함께 관중을 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항우가 잔인하다는 이유로 왕의 곁에 있는 노장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역이기는 진유현의 고양 출신으로 글을 많이 읽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생계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시골 어느 마을의 관문지기로 있었다. 현 안에 있는 유력자들은 그를 ‘미치광이 학자’로 취급해 그를 처음 채용할 때 한결같이 반대했다. 

진승과 항량 등이 군사를 일으키자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는 장수들이 다투어 일어났고 그 중에서 여러 장수들이 고양 땅을 지나갔다. 그때마다 역이기는 그 장수들을 찾아가 만나곤 하였으나 모두가 실속 없는 일에만 집착하는 자들이어서 역이기의 원대한 뜻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몇 번 실패한 뒤로 역이기는 아예 체념하고 초야에 파묻히기로 작정했다. 

그때 패공 유방이 진유의 교외 일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패공 휘하 기사 중에 고양 출신이 있었는데 그 기사는 어느 날부터 패공으로부터 뛰어난 인재가 없는가 하고 수소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 기사가 고양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역이기가 만나러 갔다. 

“소문에 의하면 패공은 상대를 업신여기는 사람이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웅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부터 나는 은근히 그 분에게 뜻을 두었소. 하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소. 부탁이오. 패공을 만나시거든 우리 고향에 역이기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는 육십여세, 신장은 팔 척이 넘는 늠름한 모습이며 사람들에게는 미치광이 학자라는 비방을 듣습니다만 그 자신은 절대로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큰소리를 친다고 말해 주시오.”

역이기의 말을 들은 기사가 대답했다. 

“패공은 학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갓 쓴 선비가 찾아오면 그 갓을 벗겨 오줌을 누는 그런 위인이요. 상대가 선비가 아닐 경우에도 패공은 욕지거리를 퍼붓기 일쑤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학자를 천거해 봤자 괜한 헛수고일 것입니다. 당신의 건의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아니오. 제발 내 말대로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사는 군막으로 돌아가 패공을 만나 역이기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패공이 고양의 역사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보내 역이기를 불렀다. 역이기가 그를 찾아 갔을 때 패공은 마침 발을 씻고 있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뻗고 여종들에게 발을 맡기고 있었는데 그런 상태로 역이기를 만나려고 했다.

역이기는 그 앞으로 나아가 정중한 인사를 갖추지 않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대뜸 큰소리로 말했다. “귀공은 진나라 편에 서서 제후들을 공격하려는 것이오, 아니면 제후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이오? 도대체 어느 쪽이오?”

그 말에 패공이 불쑥 소리를 내질렀다. 

“이 얼빠진 놈아! 천하가 모두 진나라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어서 제후들과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고 있거늘, 진나라 편에 서서 제후들을 공격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패공의 그 말에 역이기도 물러서지 않았다.

“의병을 모아 진나라의 무도함을 응징하려는 자가 어찌 다리를 내뻗은 채로 노인을 만나는 무례를 범한단 말이오?”

패공 유방은 즉시 여종들을 물러가게 하고 의관을 갖춘 뒤에 역이기를 윗좌석에 앉히고 지신의 무례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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