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조(六曹)는 현재의 법무부, 국방부, 국토부 등과 같은 조선시대의 행정조직을 일컫는데,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여섯 개의 조(曹)로 구성돼 육조라고 불렀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세종로 옛 이름 ‘육조거리’ 혹은 ‘주작대로’
오늘날 국방부·기획재정부·외교부 등 모여 있던 곳
‘천지’ ‘춘하추동’ 이념과 원리, 육조 안에 담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문관을 선발하고 임명하오.” (이조판서)
“나라의 재정을 담당하오.” (호조판서)
“음악과 제사, 외교 등을 맡고 있소.” (예조판서)
“무관을 선발하고 임명하오. (병조판서)
“법률 제정과 시행을 맡소.” (형조판서)
“국가의 공사, 교통 등을 담당하오.” (공조판서)

TV 사극 드라마나 한국 고전을 다룬 영화에서 ‘육조판서’라는 말을 들어봤을 거다. 육조(六曹)는 현재의 법무부, 국방부, 국토부 등과 같은 조선시대의 행정조직을 일컫는데,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 여섯 개의 조(曹)로 구성돼 육조라고 불렀다.

이들을 대표하는 장관급 우두머리가 바로 ‘판서(判書)’다. 다음 자리는‘참판(參判)’이었다.

▲ 옛 육조대로 모습. (출처:서울시)

◆육조, 어떻게 탄생되나

‘육조’의 시작은 고려시대다. 1298년(충렬왕24)에 ‘이·호·병·형·예·공’의 6부(部)를 ‘전조·민조·병조·형조·의조·공조’로 개칭했고, 이때 처음 6조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후 6부(六部), 육사(六司)로 변경됐다.

그러다 1389년(공양왕1) ‘이조·호조·병조·형조·예조·공조’의 6조로 개칭됐다.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1392년(태조1) 육조를 뒀다. 그리고 국정 총괄기구인 ‘의정부’가 각사를 관장토록 했다.

육조의 수장은 전서(典書)라 불렀고, 정3품(正三品)이었다. 당시 품계가 낮아 조정에 참여하지 못해 단순한 정무 집행 기관에 불과했다.

이를 바꾼 게 태종(제3대 왕)이다. 권력다툼 끝에 왕의 자리에 오른 태종은 왕권강화에 주목했다. 그는 사병을 거느리는 걸 금지했고, 군권을 장악했다. 또 재상들이 모여 나랏일을 의논하던 의정부의 권한도 약화시켰다.

이어 육조가 왕의 명령을 직접 집행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태종은 관제를 개혁해 6조의 전서를 정2품(正二品) 판서로 승격시켰다.

이후 세종(제4대 왕)은 유학의 행정, 직제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주례(周禮)’에 따라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로 서열 순서를 바꿨다.

◆‘천지·춘하추동’ 담은 육조

특히 주례에 나타난 천지(天地)와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이념과 원리를 육조 안에 담았다.

먼저 육조 중 으뜸인 ‘이조’의 별칭은 천관(天官)이다. 이조는 문관 선발과 임명, 봉급 설정, 관직과 작위 책봉, 공신 치하, 인사고과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지금의 ‘행정자치부’라 할 수 있다.

육조의 두 번째 자리인 ‘호조’의 별칭은 지관(地官)이다. 오늘날 ‘기획재정부’로 인구 및 가구 조사, 백성 노역 관리, 진상품 관리, 조세 등을 관리했다.

‘예조’의 별칭은 춘관(春官)이다. 예법, 음악, 제사, 연회, 사신 대접, 파견, 과거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지금의 ‘교육부,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라 할 수 있다.

‘병조’의 별칭은 하관(夏官)이며, 오늘날 국방부에 해당된다. 무관 선발과 임명, 군사 업무, 국가 의식 호위, 병기 갑옷 생산, 성문 경비, 궁궐 열쇠 관리 등을 맡았다.

‘형조’의 별칭은 추관(秋官)이다. 국법과 관련된 업무로 죄인의 형벌을 결정한다. 중죄인에 대한 재심사와 재조사, 죄수와 노예 관리도 한다. 지금의 ‘법무부’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공조’의 별칭은 동관(冬官)이다. 산림과 공예품, 도량형 제작, 궁궐이나 관청의 신축, 수리, 도기와 금속 제작 등을 맡았다. 현재의 ‘국토교통부’에 해당된다.

▲ 옛 육조거리였던 오늘날 세종로의 모습.ⓒ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 핵심 관청 나란히 배치

육조거리는 오늘날 서울 세종로 광화문 앞에서 나지막한 언덕인 황토현(黃土峴)까지 이어지는 넓은 대로다.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고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조성했다. 경복궁 창건 후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 관청이 육조거리에 나란히 배치됐다.

광화문에서 볼 때 왼쪽에는 의정부와 이조·예조·호조가, 오른쪽에는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삼군부와 중추부·사헌부·병조·형조·공조가 세워졌다. 이들은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의 뼈대를 형성했다.

육조거리는 관리들이 출퇴근하는 길이며, 가끔 왕이 나와 출정하는 군인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백성을 만나는 곳이었다. 조신(조정에서 벼슬살이하는 신하)이나 유생들이 엎드려 왕에게 집단으로 의견을 호소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육조거리는 ‘광화문통’이라 불렸다. 이후 조선시대 관아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군사 정권을 거치면서 하나씩 사라졌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육조거리. 아스팔트와 빽빽한 고층빌딩만 가득하다. 하지만 최근 깊은 잠에서 깰 조짐을 보인다. ‘의정부 터 발굴추진사업’으로 말이다. 아울러 발굴사업과 함께 하늘과땅, 자연을 담은 선조들의 사상도 함께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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