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주인공 도연명(陶淵明) 시인의 별명은 ‘오류(五柳)’선생이었다. 그가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문 앞에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라고 했기 때문이다. 벼슬에 연연했던 ‘오류적(誤謬的)’ 과거의 삶에 대한 자성이 아니었을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산 시인들이 많았지만 도연명은 남달랐다. 버려진 땅을 갈아 밭을 만들고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귀거래사의 프롤로그는 농사꾼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이렇게 담고 있다.

-자, 돌아가자/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도연명의 꿈은 벼슬보다는 농사였다. 인품이 좋지 않은 관리가 자신을 감찰하려 하자 ‘쌀 몇 되에 머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여 관복을 벗었다. 그리고 부귀영화를 버리고 낙향하여 뽕밭을 갈았던 것이다.

시인은 농사를 지으면서 초야의 민초들과 어울려 술을 많이 마셨다. 도연명의 시야에 보이는 자연은 모두 아름다움이며 시였다. 귀거래사는 벼슬에 염증을 느껴 시골로 낙향하는 선비들의 풍류로 회자되어 왔다.

조선시대 낙향선비들 가운데는 도연명의 풍모를 닮고 싶어 한 이들이 여럿 있다. 세종 때 재상을 지낸 고불(古佛) 맹사성은 인품이 훌륭한 학자였으며 효자였다. 맹사성은 아산에 낙향하여 농사를 짓는다.

밭에 나갈 때는 항상 소를 타고 나가 그가 정승을 역임한 재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의 방문이 있을 때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단정한 차림으로 맞아 예의를 갖췄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학자 박세당(朴世堂)은 높은 벼슬자리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에 전념한 이다. 의정부 수락산 남쪽 석천동(石泉洞)으로 내려와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색경(穡經)’이란 책을 저술했다.

이 시기 괴산군수를 지낸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도 만년에 군수직을 내놓고 청주시 옥화대(玉華臺)에 살면서 농사와 거문고를 벗 삼아 유유적적하게 보냈다. 우암과 함께 사계 김장생 문화에서 동문수학했지만 우암과는 달리 독농(篤農)을 주장하며 농사를 매우 중요시 했다. 서계의 문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 어려운 세상을 맞아 남편은 땅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짓는 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길을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밭이여, 밭이여!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하략).”

제4공화국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고(故) 신두영옹은 만년에 고향인 충남 공주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평소 농사꾼으로 손님을 맞이하던 소탈하고 인자한 모습을 필자는 잊지 못한다.

전 단양군수를 지낸 김동성 군수가 단양 사인암 부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2년 전 단체장선거에서 군수 출마를 안 한 그는 아로니아를 재배하는 평범한 농사꾼으로 돌아간 것이다. 8년 동안 군수 직을 하면서 1천만 관광객 유치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김 전 군수는 ‘농사는 힘이 들지만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전직 고위공무원들이 직에서 물러나면 대개는 대도시로 나가 고향을 등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전 군수의 모습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민들과 더불어 농촌 부흥에 앞장선 미담은 현대판 귀거래사가 아닐까. 고향을 지킨 훌륭한 명사들의 유풍이라 고사를 반추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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