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북쪽 하늘에서 기러기가 울고 온다. 가을이 온다. 밤이 되어도 반딧불이 날지 않고 은하수가 점점 하늘 한복판으로 흘러내린다.…’

이 글은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내가 자주 읊던 내용으로 처음 글을 접했을 때가 아마 중학생 때로 기억된다. 그 당시에도 한여름은 무더워서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면 동네 사람들이 집 부근 방천길에 자리를 깔고 더위를 견뎠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 하다가 자리에 누워 하늘을 보곤 했는데, 웬 은하수가 그리도 길게 뻗쳤는지, 또 반딧불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풍경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시골에서만 볼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꿈같은 이야기다.

더위가 맹위를 떨치지만 가을이 움 트기 시작하는 처서(處暑) 직전이 되면 느닷없이 어린 시절에 자주 읊조렸던 서두의 글이 생각나곤 했다. 오늘도 새벽운동에 나서 동네 학교운동장을 돌다보니 며칠 전만 해도 우렁차게 들려오던 매미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한낮이면 시원스레 울어 제치는 매미울음이 새벽에 들리지 않는 것은 이제 서서히 무더위가 가시고 있다는 조짐이다.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한낱 미물도 아는구나 생각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북쪽 하늘에서 기러기가 울고 온다. 가을이 온다.…’는 말을 낮게 읊조리며 운동장을 걸었다.

새벽운동을 마치고 햇살이 아파트 꼭대기에 퍼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조금 전도 마찬가지지만 어린 시절에 알게 돼 자주 애송했던 그 글 제목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알아봐야지 생각하고서 집에 도착해 바로 컴퓨터를 켰다. 글 내용이 어린 시절의 시골풍경 그대로인데다가 또 은하수니 반딧불이니 서정성이 깃든 것이라 시(詩)인줄 알았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소설에서 나오는 한 문장이었으니 오랜 세월 착각한 것이다.

우리나라 소설의 거장으로서 일제강점기 때부터 빼어난 단편소설을 많이 썼던 김동리 선생(1913~1995)의 ‘바위’에 나오는 첫 머리 문장이었던 것이다. 김동리 선생은 소설가인지만 시인으로 등단해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낸 분이기에 단편소설 속에 나오는 내용들이 시어처럼 곱고 특히 경상도 경주 출신이라 시골 풍경이 많이 담겨져 있다. 그러면서 서민의 애환을 그린 부분도 많은데 바위가 바로 그런 내용이다.

반딧불이 날지 않고 밤하늘 은하수가 한복판으로 흘러내리며 기러기가 온다는 것은 가을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가을이 옴은 멀지 않아 추위가 온다는 것이고, 가을이란 계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근심 걱정이 찾아오는 계절이라는 전개로 ‘바위’ 소설의 첫 문장에 ‘북쪽 하늘에서 기러기가 울고 온다’고 서술했음인데, 지금은 가난한 서민들은 여름 지내기가 더 어렵다. 추위가 닥치면 옷이라도 몇 겹을 껴입고 견딜 테지만 폭염은 정말 견디기가 힘겨운 것이다.

요즘은 사람들을 만나면 가마솥더위가 단연 화젯거리다. 7월에 이어 8월 날씨도 신기록을 갈아치웠는바, 서울의 8월 기온이 108년 만에 최고치를 보였다는 소식은 전혀 낭보가 아니다. 폭염일수도 1943년과 1939년에 이어 역대 세 번째라는데 이달에 들어서만 서울의 열대야일수가 역대 최다인 19일을 기록했다니 정말 살인적 무더위다. 그렇다보니 온열질환자가 속출하게 되고 무더위로 인한 발병이 남녀노소나 시간대,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극성을 부리는 시기다.

오늘 아침 뉴스도 폭염소식으로 시작되고 있다. 주말 최고기온이 경북 상주지역 섭씨 36도를 비롯해 서울이 34도, 대구·광주가 35도이라고 하니 매미소리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푹푹 찌는 더위는 막바지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유난히 더운 올해 꽤나 오랫동안 지속돼온 열대야 현상으로 밤마다 잠을 빨리 못 이뤄 몸 마음이 모두 지쳤지만 실상은 무더위의 끝 무렵인 것이다. 이틀 후가 처서이고 보면 마라톤경기로 치자면 힘들게나마 40㎞는 족히 달려온 것 같다.

칼럼을 쓰는 이 시간도 오전 나절이지만 후덥지근하다. 선풍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올 들어 가장 많이 팔렸다는 에어컨도 서민에게는 전기료 폭탄으로 떨어질 터, 나름대로 폭염 견디는 방법을 생각했다는 아내가 내게 알려준 얼음주머니는 때맞춰 잘 사용했다. 냉동고에 넣어둔 얼음 팩을 수건으로 둘둘 말아 등 뒤에 대고 있으니 정말 시원했다. 그렇게 무더위를 견디며 곧 있어 매미울음소리 그치면 가을이 오겠거니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시로 알고서 늦여름이면 애송했던 글, 김동리 선생의 ‘바위’ 첫머리 뒷내용을 다시 한 번 읊어본다. 시간이 흘러 가을, 겨울이 되면 폭염의 올 여름도 분명 그리울 때가 있으리니.

‘… 밤이 되어도 반딧불이 날지 않고 은하수가 점점 하늘 한복판으로 흘러내린다. 아무데서나 쓰러지는 대로 하룻밤을 새울 수 있던 집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러기 소리가 반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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