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살인면허’란 말은 있어도 ‘탈북면허’란 말은 모두 생소할 것이다. 일단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여권을 휴대한 북한 주민을 우리는 ‘탈북면허’ 소지자라고 칭하고 싶다. 왜? 그들 모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탈북해 자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체제에서 대량탈북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고 사회주의 50년 사상 최악의 재난이 들이닥치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을 때 발생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국경을 넘는 탈북민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자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김정일은 통제불능 상태의 북한 체제에서 이른바 ‘불평분자’들이 떠나는 것을 내심 환영했는지도 모른다.

일부에선 그들의 탈북을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탈북’으로 평가절하 하는 경향이 있는데 시정돼 마땅하다. 그들이야말로 북한 독재체제에 말로가 아닌 사생결단의 항거로 보여준 분단시대의 용감한 투사들이 아닐까. 그렇게 시작된 대량탈북이 김정은 시대의 개막과 함께 서서히 막을 내리는 듯했다. 김정은은 국경봉쇄와 지역 간 주민교체로 국경을 통한 탈북의 엑서더스에 일단 브레이크를 밟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지금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가? 앞마당의 암탉을 지키는 동안 뒷마당의 송아지가 달아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바야흐로 북한의 급변사태는 현실화되고 있다.

태영호 공사의 경우 본인의 지위가 높기도 하지만 다름 아닌 ‘빨치산 가문’이다. 그의 능력도 탁월했겠지만 빨치산 가문이 그의 출세를 보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처가댁의 오백룡 대장은 북한 현대사에서 중요 지위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세 오씨 가문, 즉 정통 오씨 일가인 오극렬 대장과 최고위직의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충성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위간부가 다름 아닌 오백룡 대장이었다. 오백룡 대장은 오극렬과 오진우 두 오씨 일가의 그늘에 가려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정통 빨치산 출신으로서는 오히려 연대장급으로 더 지위가 높았던 군인이었다. 현재 오금철 부총참모장과 오철산 전 해군사령부 정치위원이 오백룡의 뒤를 잇고 있지만 김정은 정권에서 항상 찬밥 신세다. 어디 이들뿐인가? 김정은 위원장은 이른바 빨치산 2세들을 뒷전으로 밀어내며 3대 세습체제에서는 그들의 두각을 원치 않고 있다. 오진우의 아들 오일정 전 노동당 군사부장도 상장에서 중장으로 강등되어 한직에서 맴돌고 있으며 오금철 부총참모장도 이병철 전 공군사령관 곁에도 못 가고 있다. 단지 최현의 아들 최룡해만이 제 몫을 하고 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난 너희들 신세 진 적 없어, 아버지는 빨치산 1세대의 도움으로 지도자가 됐지만 난 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빨치산 가문이 탈북행렬에 동참했다면 다음은 ‘만경대 가문’ 차례인가? 만경대 가문마저 탈북행렬에 동참하면 그 날은 북한 ‘최후의 날’이 될 것이다. 현재 북한 정권에서 ‘만경대 가문’은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해 강관주 당 부장 등 꽤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과거 빨치산 가문이 과오를 범하면 혁명화를 바로 보냈지만 만경대 가문만은 그것을 덮어줄 정도로 그들은 특권을 누리며 살아왔다. 김정은은 현재 외교관 가족들을 모두 평양으로 소환하며 그들의 탈북을 방지하고자 고육지책을 총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임시방편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빨치산 가문마저 북한 체제에 등을 돌리는 것은 단순히 자녀교육을 잘 시켜 보자든지 하는 근시안적 발상이 가져다준 단순한 결단이 아니다. 이제 김정은 정권에게는 희망이 사라지고 곧 평양정권은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이 그들 최후의 선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의 나라라고 하지만 외화가 없으면 얼마 못가는 ‘한시적 정권’이다. 그동안 이걸 몰라서 모두 우왕좌왕했는가? 그것 역시 아니다. 빤히 알면서도 모두들 손 놓고 구호만 외친 것이다.

통일은 다가오고 또 해야만 하는 숙명적인 것이다. 김정은 정권이 사라지면 그것이 가장 빠른 통일이다. 급변사태를 북한 정권 스스로 불러오고 있다. 오늘 도미노로 이어지는 고위층의 잇단 탈북이 북한 정권 엘리트들에게 주는 임팩트는 계량하기 어렵다. 어제 노동당 국제비서 황장엽 선생이 망명하고 오늘 태영호 공사가 망명을 선택했다면 내일은 1997년 장승길 이집트 대사처럼 어느 나라의 북한 대사가 대한민국을 선택하게 될지 모른다. 김정은도, 노동당도 그것을 가로막을 힘을 상실한 지 오래다. 단지 막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 엘리트들에게 통일 후 생존을 보장해 준다고 선언하고, 나아가 독재청산에 앞장서는 자에게 포상금도 준다는 파격적 선언을 할 필요가 있다. 고위층들이 서울에 와 자식 공부나 잘 시키는 것으로 탈북 현대사가 왜곡되지 않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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