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치석 소장이 ‘철종가례반차도’를 펴 보이고 있다. 24m의 두루마리로 제작돼 왕의 행렬 모습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인터뷰 | 조선왕조문화예술교육연구소 황치석 소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전세계 유일, 사료적 의미 커

의궤, 행사도구·복식 그린 ‘도설’
행사장면 그린 ‘반차도’로 나눠

몇 달간 하루 1시간 자며 그려
채색부터 절첩까지 끈기로 완성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스윽, 스윽’ 먹(墨)을 천천히 간다. 이내 작은 붓을 집어 든다. 먹물을 살짝 묻히더니, 한지에 선을 하나하나 긋는다. 잠시 후, 한지 속에서 옛 선조들이 ‘빼꼼’하며 하나둘씩 고개를 내민다. 그림 속 선조들은 조선시대 왕실을 재연하듯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손짓했다.

‘의궤(儀軌)’를 제작하고 있으면 가슴이 설렜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이끌림인 걸까. 의궤와의 만남은 숙명(宿命)이었다.

황치석(55) 조선왕조문화예술교육연구소 소장은 “의궤는 세계에도 없는 우리나라의 기록 문화유산”이라며 “의궤를 제작하는 데 사명감이 크다”고 말했다.

◆의궤란?

‘의궤’는 왕실과 국가의 주요한 행사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조선왕조는 왕실의 혼례, 장례, 제사(종묘사직), 잔치, 세자·왕후의 책봉, 궁궐 건축, 국왕의 행차, 친경·친잠, 대사례(大射禮), 어진 등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의궤는 글로만 기록된 게 아니다. 현장 그림의 경우 사진 찍듯 정교하게 담아 놓았다. 그림도 두 종류다. 하나는 도설(圖說)이라 하여 행사에 쓰인 주요 도구나, 행사 때 착용하는 복식 등을 그렸다.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 분량, 장식 방법 등 설명을 함께 적기도 했다.

또 하나는 반차도(班次圖)다. 반차도는 왕실 행사 주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문무백관이 늘어서 있는 의식의 차례를 생생히 묘사했다. 반차도는 직접 손으로 그린 것도 있고, 목판으로 외곽선만 찍고 색을 덧칠한 것도 많다. 반차도는 행사 전이나 행사 후에 기록된다. 행사 전에 제작된 것은 사람과 직책, 배치 등을 파악해 실제 행사에서 시행착오를 줄이는 용도로 사용됐다.

◆의궤, 왜 중요한가

중복된 경우를 제외하면 현존하는 의궤류는 637종이다. 의궤는 규장각, 장서각,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등에서 소장해왔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보관된 의궤를 약탈, 프랑스로 가져갔다. 이를 파리국립도서관이 보관해 왔으며, 전체 어람용 의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가치가 매우 컸다.

외규장각 의궤는 파리국립도서관에 재직했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 처음 발견,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처음 반환요청을 제기한 후 외교부 등 끈질긴 노력으로 145년 만인 지난 2011년 ‘영구 임대’ 형식으로 귀환됐다. 하지만 여전히 소유권은 프랑스에 있어 쓰라린 역사는 좀처럼 아물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의궤가 가진 사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먼저 전 세계에서 의궤를 만든 나라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밖에 없다는 점이다.

보물로서도 중요하다. 최근에는 사천시가 보관 중인 ‘조선왕조의궤’인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 3건 3책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1901-4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정신’도 가치가 크다. 이 같은 의궤를 통해 우리는 역사와 문화, 선조들의 삶, 강인한 정신력을 배울 수 있다.

▲ 황 소장이 먹이 묻은 붓으로 반차도를 재현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만약 의궤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대장금’ 등 사극 제작은 물론이요, ‘수원 화성’ 등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지금까지 보지도, 만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옛 모습을 되찾고, 전통과 사상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보물지도’가 바로 의궤다.

“조선왕조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그 문화적 가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반차도는 조선왕조 의궤 중 회화적 가치와 그 시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절첩으로 의궤 제작

의궤의 중요성을 가슴으로 느껴서 일까. 의궤 제작은 ‘천명(天命)’처럼 황 소장에게 다가왔다. 특히 그는 의궤의 백미인 그림부분의 반차도 재현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철종가례반차도’가 있다. 철종(조선 제25대 왕)과 철인왕후의 혼례 모습이 담긴 이 그림은 조선왕조 의궤 가례반차도 중 가장 길고 화려하다.

황 소장은 2012년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의 심의를 거쳐 ‘서울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지원 대상자’로 선정돼 반차도를 재현하게 됐다. 특히 기존과 달리 의궤를 ‘두루마리(24m)’로 재현했다.

“기존의 반차도는 92면의 책으로 제작됐습니다. 책이라 보니, 2면씩으로만 그림을 볼 수 있었죠. 왕의 행렬 모습이 굉장히 긴 데, 한 번에 볼 수 없어 늘 안타까웠습니다.”

이 같은 반차도의 한계를 극복, 24m 두루마리로 재현해 행사의 전모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선과 색에 생동감이 고스란히 담겨, 보는 이도 행렬에 참여하는 느낌을 줬다.

‘왕세자 입학도’도 재현했다. 이 그림은 순조 17년(1817) 3월 11일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례절차의 그림·축시로 구성됐다. 특히 30면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절첩(10m)’ 형태로 재현했다.

▲ 의궤 제작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황 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의궤 제작 위해 하루 1시간 자

의궤는 엄청난 노력과 끈기의 결과물이었다. “‘철종가례반차도’를 제작할 땐, 밤 12시부터 먹을 갈고, 집중해서 선을 하나하나 그렸어요. 몇 달 동안 하루에 1시간씩 자며 의궤를 완성했죠.”

반복되는 황 소장의 모습에 “엄마, 기계인간 같아요”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듣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의궤 제작에 열과 성을 다했다.

우선, 의궤에 쓰인 안료(채색 재료)를 찾기 위해 문헌 기록을 찾아보고, 실제 의궤에 사용된 안료를 분석해 의궤를 제작했다. 두루마리·절첩 연결 작업 등을 위해 서울 곳곳을 누비며 전문가를 찾기도 했다. 어람용 의궤를 여러 번 비교·검토하기도 했다. 그 끈기로 완성된 반차도. 그 값어치는 엄청났다. 이 같은 전통을 잇는 사명이 후대에도 이어지길 그는 바라고 또 바랐다.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흔히 ‘예술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클래식도 수백 년 전 것을 그대로 재연합니다. 전통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죠. 창작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게 전통입니다.”

특히 의궤의 맥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궁중화 영역’에서 의궤 제작이 문화재로 지정돼야한다고 그는 말했다. 또한 시민이 역사를 사랑하고 관심 가져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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