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의 문화 창] 올림픽 열기 속에 맞는 광복절
[전경우의 문화 창] 올림픽 열기 속에 맞는 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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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서양 스포츠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개화기 때였다. 1890년 미국인 알렌 부부가 고종과 민비 앞에서 스케이트를 처음 선보였고, 1882년 영국의 ‘플라잉 피시’호 수병들이 인천항에서 축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7년 한성기독청년회(YMCA) 총무였던 질레트가 YMCA 야구 단원들과 함께 야구복을 입고 농구를 한 것이 우리나라 농구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1912년 단성사 주인인 박승필이 권투 구락부를 만들어 지도한 것이 우리나라 복싱의 시초고, 1923년 조선체육회 주최 제4회 전조선 축구대회 중간에 번외경기로 럭비가 첫선을 보였다.  

1906년 육군 참위(소위) 권원식 등이 효창운동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자전거 경기를 열었다. 당시에는 자전거를 자행거라 했고,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는 것은 흉으로 여겼다. 엄복동(1892~1951)은 1910~1920년대 최고의 사이클 선수였다. 그가 출전한다고 하면, 수만명이 모여들었다. 그는 48세 때 1만 미터 경기에서 우승했을 정도로 대단했다.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인 비행기 조종사였던 안창남(1901~1930)과 더불어 엄복동은 최고의 스타였고, “떴다 안창남, 내려다보니 엄복동”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일제 때 전국적인 스포츠 육성 바람을 타고 축구와 농구, 복싱, 야구가 특히 인기를 모았다.  우리 선수들은 왜놈들을 상대할 때면 독립운동을 한다는 자세로 덤벼들었다. 일본의 스포츠 논평가인 가마다는 자신의 저서 ‘일장기와 마라톤’에서, “조선 선수들이 주먹 힘을 키운 것은 불리한 판정을 피하고 KO로 이기기 위한 뜻도 있었지만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일본인을 두들겨 패서 코피를 흘리도록 만들고 쓰러질 때까지 때려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와세다 대학 선수들이 원정을 온 적이 있다. 이 때 왜놈 선수 6명 모두 KO패 했다. 일본 선수가 너무 두들겨 맞아 경기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는데도 한국 심판이 말리지 않았다. 더 두들겨 패라고 그냥 놔 둔 것이다. 심판들은 나중에 조선총독부에 불려가 곤욕을 치렀지만, 사람들은 십년 묵은 체증이 뚫렸다며 고소해 했다. 

베를린올림픽에는 마라톤의 손기정 남승룡, 농구의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축구의 김용식, 복싱의 이규환 등 7명이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조선인들은 실력을 갖추고도 대표로 선발되기가 어려웠다.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남승룡 선수가 3등을 한 것은 민족의 쾌거였다. 손기정 선수는 일본이름 ‘기테이 손’이란 이름으로 출전했고, 시상식에서 고개를 숙인 채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렸다. 금메달을 따고서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한 가엾은 식민지 청년이었다. 일장기 말소사건도 있었다.   

흘러간 시절의 아픈 이야기다. 이제는 우리 선수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당당한 이름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세계무대를 누비고 있다. 어디에 내놓아도 멋지고 자신감 넘치는 대한민국의 청춘들이다. 이만하게 살고 있고 이만큼 살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이번 리우올림픽에는 난민 선수들도 참가하고 있다. 제 나라 국기를 달지도 걸지도 못하고 출전하는 선수들이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나라를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는 것을 또 느끼게 된다. 돌아오는 8월 15일이 71번째 광복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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