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따뜻한 인정미는 살아있었다. 뜬금없이 낯모르는 외지인이 나타나 길을 물어도 미소와 함께 친절히 대답해주는 시골 할머니, 아줌씨들이 반갑다. 그리고 금수강산이다. 볼수록 아름답고 갈수록 무궁무진한 산이요, 바다요, 식물이요, 착한 동물들. 녹음이 짙어진 산은 건강하고 풍요로웠고, 푸른 바다는 엄마 품처럼 평화롭고 포근했다.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 휴가철 아니면 가까이하기 힘든 신비로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다도해. 마치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 가슴에 담아두기라도 할 듯 수평선을 한없이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문제는 대통령병(病)에 걸린 못난이만 많고 진정한 정치지도자는 없다는 것이지요.” 짧은 남도 여행에 동참한 후배 L이 광활한 김제평야를 지나며 한 말이 부유물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축복받은 곡창지대를 손으로 가리키며 한 L의 말인즉슨 이렇다. ‘한반도는 참으로 복받은 땅이다, 정치지도자들이 정치만 잘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겠느냐’는 것. 조선 선조 때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지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 반세기 가까운 굴욕의 일제치하와 비극적인 6.25한국전쟁, 그리고 최근 IMF경제위기까지도 슬기롭게 극복한 우리 한민족이 아닌가. 지금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힘들고 민감한 위기상황이지만 힘을 합치면 극복하지 못할 게 무어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김구나 왕건, 단군 같은 큰 인물은 출현하지 않고 있다.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같은 엣지 있는 지도자도 없다. 큰 정치, 큰 정치인이 나와 주어야 할 텐데. 국가적, 국민적 헤저드를 헤쳐 나갈 안목과 리더십을 지닌 멋있는 인물이 있어야 할 텐데. 과연 누가 진정으로 마음을 비운 지도자인가. 누가 고질적인 대통령병(病)을 넘어 민심을 수람할 수 있을까. 얘기 끝에 지금의 대권주자들을 차례로 손꼽아 보았다. 손학규, 김무성, 반기문,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유승민, 홍준표…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소시민인 L과 소주 몇 잔 주고받으며 나눠본 세간의 평판을 모아본다. 순서는 랜덤, 직책은 생략.

손학규. 정치부 기자들의 대통령 선호도 1위 정치인이다. 필자가 취재기자였을 때도 그랬다. 청렴성, 민주화투쟁 경력, 서울대-옥스포드대 정치학 박사 경력이 말해주는 지성미 등에서 돋보인다. ‘저녁이 있는 삶’ ‘새판짜기’ ‘국가대개조론’ 등 자신의 철학을 담은 저서가 곧 출판될 예정이어서 주목. 세심하고, 빈틈없다. 빈 구석이 없다는 게 되려 2% 부족한 부분이라고나 할까. YS나 DJ가 지녔던 동물적인 ‘감(感)’이나 큰 포용력이 빛나지는 않는다. 능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주위 지인들의 조언에 귀를 잘 열지 않는다는 평도 있다. 손학규계는 수효가 많지 않다. 김부겸 정운찬 정의화 등과 손잡고 야권통합도 성공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 지역기반 세대기반을 뛰어넘어 미래지향적인 실용주의 노선을 걸어가며 독자세력화해야 할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중 어느 특정 당에 뛰어들기보다 백의종군하며 대학시절, 청년시절처럼 싸우라. 정치공학 9단보다는 의인(義人)의 메시지 정치로 민심을 수람하라.

김무성. 뛰어난 친화력에 호형호제하는 국회의원 머릿수가 가장 많은 대권주자 아닌가. 콘텐츠가 좀 부족한 듯도 하지만, 그래도 과묵한 형님 같고 마음 든든하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 후보와 충돌하며 손해를 많이 보았다. 하지만 정작 큰 사단은 유승민 파동과 4.13총선 공천 과정에서 벌어졌다. 청와대에 비굴할 정도로 너무 꿇어 엎드린 탓에 잃은 게 더 많다는 평이다. 묻고 싶다. 민심(民心)이 중요한가, 박심(朴心)이 중요한가. ‘청(靑)’보다는 민생고에 시달리는 국민 편에서 진작 대립각을 세웠어야 했지 않았는가. 친일·항일 논란이 있었던 방직기업인 선친 덕에 부자. 그러나 태생적으로 큰 부(富)를 손에 쥐어보았으니 오히려 YS처럼 물욕을 버린 모습을 보인다면 크게 어필할 수도 있다. 런닝메이트와 기획 참모에 비범한 인물을 찾아보라. 통일한국에 대한 비전, 경제난 극복을 위한 혜안을 갖춰야 한다. 차제에 왜 정치를 하는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후대를 위해 정치개혁에 올인하는 모습부터 보여주는 게 낫지 않는가. 부산이라는 지역 기반, 상도동계 YS적자라는 최고 강점은 살리되 대통령병을 초월한 자세로 대선가도를 바람처럼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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