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녁에도 오는 저승비

랑승만(1933~2016)

그 건 봄날의 장마에도
비 한 방울 맞아 보지 못하고
어느 반시신(反尸身)처럼 후줄근히 버려진
우산이나 펼쳐들고
이 봄날에 마지막 오는 비를 맞으며
가버린 그네라도 만나
호젓한 찻집이나
낮선 주막에라도 들러
차를 마시건 술 한 잔 기울이면
그게 곧 세상사는 기쁨이겠는데
술도 못하고
먼지 자욱한 세상을
이 저녁에도 오는
저승비를 맞으며
절뚝거리는 쓸쓸한 귀가의 발길이여…

[시평]

나이가 들고 또 몸에는 병이 들고, 사랑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가고, 그런 적막한 시간. 비오는 어느 오후 절룩이며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귀가의 시간. 쓸쓸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교차함을 느낀다.

가버린 그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호젓한 찻집이나 낮선 주막에라도 들러, 술이라도 한 잔 기울일 수 있다면, 그게 곧 세상사는 기쁨이겠지만. 이제는 병도 깊어지고 술도 못하는, 다만 먼지나 자욱이 이는 이 막막한 세상 속에서, 저승비나 맞으며 절뚝거리며 귀가하는, 이 쓸쓸함이여.

삶이라는 것이 종국에는 모두 이러한 것인가. 진정 이러한 것인가. 병들어 아픈 몸을 이끌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만도 서러운데, 보고 싶은 사람도 보지 못하는 이 적막함. 노인 인구가 나날이 늘어가는 오늘의 현실 속, 이러한 아픔을 겪는 사람이 결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닥쳐올지 모르는, 우리 모두의 일. 우리들 앞날의 일 아니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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