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기념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채광묵·채규대 부자’ 선정 ⓒ천지일보(뉴스천지)

독립기념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채광묵·채규대 부자’ 선정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나라의 힘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앉아 원수 놈들의 압제를 두고 본단 말이오.”

일제 강점기에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에 대한 감사함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당시 대한제국을 삼키려는 일제의 횡포는 나날이 거세져 갔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수법은 점점 강해졌다.

그 속에서도 의병들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또 싸웠다. 그 피 값으로 광복이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안에는 채광묵·채규대 부자 의병장도 있다. 역사 속 인물을 통해 나라를 사랑했던 의병 정신을 알아보자.

◆1896년 홍주의병 항쟁

채광묵(1850~1906년)은 조선말 의병장이다. 그는 구한말 항일 민족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충남 홍주 매평리(충청남도청양)에서 태어났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채광묵은 박창로, 안병찬 등과 홍주성(洪州城)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1896년 1월 16일 홍주관아에 창의소(의병을 훈련시키고 지휘하기 위해 세운 조직)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채광묵은 남면 소모관(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된 벼슬아치)에 임명돼 파견됐다. 하지만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만인 1월 17일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배반해 의병 지휘부 인사들이 차례로 구속됐다. 결국 의병은 해산하게 된다.

◆상소투쟁

홍주의병이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채광묵은 상경해 송수만·김운락 등과 명성황후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소청을 설치해 이름을 ‘도약소’라고 하고 상소를 올렸다. 이를 통해 채광묵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게 복수할 것과 이를 도운 친일내각의 외부대신 이완용 등을 탄핵할 것을 상소했다.

1901년 8월에는 조정에서 내부주사 직을 내리자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영예를 받을 수 있느냐”면서 강하게 거절했다. 1904년 일본인 나가모리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김기우 등과 함께 반대 통문을 작성하고, 일본공사를 만나 이를 질타했다.

◆홍주성 전투와 순국

1905년 을사조약(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채광묵은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전 참판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했다. 의병들은 1906년 3월 15일 광시장터에서 봉기해 홍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관군의 저항으로 홍주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청양의 합천에서 진을 치고 있던 중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민종식은 5월 9일 이용규 등과 함께 홍산군 지치동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5월 20일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은 이후 여러 차례 일본경찰대를 물리쳤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2개 중대 규모이상의 일본군을 파견해 홍주성을 공격했다. 참모장의 직을 받고 항전하던 채광묵은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에 따라 파견된 2개 중대 규모 이상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동료 의병과 함께 전사했다. 당시 일본군의 총알이 빗발치자 어떤 이가 그에게 대피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채광묵은 “이미 대의를 부르짖었는데 어찌 차마 도망가 살 수 있겠는가?”라며 일본군의 칼날에 전사했다. 병든 몸을 끌고 의병에 참전한 부친을모시고 항전하던 아들 채규대도 홍주성전투에서 부친과 함께 전사했으니 아버지는 충(忠)에 죽고 아들은 효(孝)에 죽었다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1977년 채광묵 선생의 독립운동을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1992년에는 채규대 선생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했다.

한편 독립기념관에서는 채광묵·채규대 부자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8월 한 달 동안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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