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 가장 오래된 ‘돈화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새소리가 유난히 아름다웠다. 구불구불한 길, 제멋대로 뻗어 올라 간 멋스러운 나무, 소박하지만 지형에 따라 배치된 건물.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지어진 ‘창덕궁(昌德宮)’은 그야말로 숲 속의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됐다. 전염병이 오거나 궁궐이 불타 버리면 임금이 갈 곳이 없는데, 이를 대비해 만든 게 이궁이다.

특히 창덕궁은 조선 궁궐 중 오랜 기간 임금이 거처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창덕궁은 잿더미로 변해버리는 데, 광해군 때 가장 먼저 복원된다. 그리고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으로 역할을 했다.

이런 창덕궁의 수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 등 많은 내란으로 수차례 화재가 나는가 하면, 일제 강점기 때 제멋대로 뜯어 고쳐지기도 했다. 그 결과 일부 건물은 자연이 녹아 흐르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잃었다.

하지만 일제도 창덕궁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없애진 못했다.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하다는 점을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지정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자연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창덕궁, 그 속으로 함께 거닐어 보자.

▲ 600년이 된 금천교. 우리나라 궁궐에 남아있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조선의 산 증거 ‘돈화문’ ‘금천교’

‘내 나이는 600살.’

창덕궁의 시작은 ‘돈화문(敦化門)’에서부터다. 1412년 만들어진 돈화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됐다. 돈화문은 5칸 대문이다. 5칸은 중국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경복궁, 창경궁, 경희궁 등 우리나라 궁궐 정문은 모두 3칸이지만, 유독 돈화문만 5칸이다.

돈화문으로 입궐하면, 금세 금천교(錦川橋)를 만난다. 태종 11년, 즉 창덕궁이 세워진 지 6년 뒤에 만들어진 이 다리는 나이로 치면 약 600살이다.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살아남아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존하는 5대궁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됐다.

▲ 인정전 앞마당에 깔린 박석과 품계석.ⓒ천지일보(뉴스천지)

◆왜란 후 조선의 정전 ‘인정전’

무성한 숲을 배경 삼아 단정히 지어진 인정전(仁政殿)’.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 행사가 치러진 곳이다. 경복궁의 근정전보단 크기가 작지만, 아름다운 천장문양 등 예술적 가치가 빼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창덕궁의 앞마당인 조정에는 박석이 깔려있다. 박석 위에는 신하들의 지위가 적힌 품계석이 있다. 하지만 박석 모양이 왠지 부자연스럽다. 원래 인정전의 박석은 자연석을 살짝 다듬어 깔았다. 둥글둥글하고 투박스러운 멋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때 이 돌들이 모두 걷어지고, 잔디가 깔린다. 정부는 1997년 잔디를 걷어내고 새로 박석을 덮었지만, 기계로 깎은 반듯한 모양이라 옛 멋스러움은 이젠 느낄 수 없다.

인정전 내부는 궁궐이라고 보기엔 다소 어색하다. 커튼과 서양식 실내 기구, 가구, 전돌 대신 마루가 있기 때문. 이는 1908년 인정전 내부를 개조할 때 들여온 것들이다.

인정전 중앙에는 임금이 앉는 어좌(御座)가 있고, 곡병(曲屛)이 둘러있다. 어좌 뒤에는 천지인(天地人) 사상이 담긴 ‘일월오봉도’가 있다. 왕의 자리임을 한 눈에 알려준다. 옛 선조들은 왕이 앉는 곳을 하늘로 칭했다. 앞마당에서 인정전에 오르는 돌계단에 새겨진 ‘구름 문양’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선정전 안 임금의 자리 양쪽에는 항상 사관(史官)이 앉았다. 사관이 임금의 말과 행동을 적은 사초를 토대로 조선왕조실록이 만들어졌다.ⓒ천지일보(뉴스천지)

◆임금 공식 집무실 ‘선정전’

“지혜로운 정치를 펴시옵소서.”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상참(常參)이 이뤄졌다.

선정전 안 임금의 자리 양쪽에는 항상 사관(史官)이 앉았다. 사관은 임금의 말씀과 행동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바로 ‘사초(史草)’다. 사초를 토대로 선왕이 죽은 뒤 새로운 왕이 실록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472년간의 분량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경복궁 헐어 올린 ‘희정당’ ‘대조전’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희정당은 임금의 침전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공식 업무를 보는 편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희정당은 인조반정 때 불타 없어졌다 인조 25년(1647)에 재건된다. 원래 희정당 앞에는 작은 연못도 있었고, 자연과 어울리게 작고 아담하게 지어졌다. 그러다 1917년 큰 화재로 소실된다. 일제는 희정당을 경복궁의 ‘강녕전’을 뜯어다가 짓는다. ‘자금 부족’이란 이유다. 즉, 지금의 희정당은 원래 경복궁 강녕전 건물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작고 아담한 옛 모습의 희정당은 온데간데없고, 덩치가 큰 건물만 남아있다.

대조전(大造殿)도 마찬가지다. 화재로 소실된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지었다. 특히 대조전은 ‘한일합병조약’이 이뤄진 곳이다.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의 죄책감은 얼마나 컸을까. “광복하라. 광복하라.” 눈물을 흘리며 남긴 순종의 한마디 말. ‘빛의 회복’인 광복이 이 시대에 진정 이뤄졌는지를 묻게 만든다.

▲ 조선 황실가족이 마지막까지 머문 ‘낙선재’. 지금은 텅 비었지만 황실가족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황실가족 온기 남은 ‘낙선재’

‘조선 마지막 황실가족의 거처.’ 조선이라 하면 옛 이야기 같다. 하지만 낙선재에는 불과 몇 십년 전까지 황실가족이 살았다.

고종황제에겐 4명의 장성한 자녀가 있었다. 순종황제, 의친왕, 영친왕, 그리고 막내딸인 덕혜옹주. 광복 후 이승만 정권이 조선왕실의 모든 재산을 압수하려 했다. 하지만 순종황제의 비이자 조선왕조 마지막 중전인 순정효황후 윤씨는 정권에 맞서 꿋꿋이 낙선재를 지켰다. 그리고 황실가족을 쓸쓸히 기다리다 1966년 이곳에서 눈을 감는다.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도 이곳 낙선재를 지켰다. 덕혜옹주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조선왕조의 혈통을 끊기 위해 덕혜옹주를 강제로 일본 인과 결혼 시켰다. 그 뒤 이혼하고 힘든 세월을 지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눈을 감는다. 2005년 7월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손 이구의 장례식이 이곳 낙선재에서 행해진다.

지금은 텅 빈 낙선재. 하지만 조선황실의 온기를 기억해 주는 듯 낙선재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수백년간 창덕궁을 지켜온 자연들도 마치 주인을 손꼽아 기다리는 듯 푸르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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