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소비자분쟁해결기준 행정예고… 10월 시행
중대결함 3회·일반하자 4회 시 ‘교환·환불’ 가능해
강제성 없어 실효성 지적… 전문가 “징벌적 배상 필요”

[천지일보=손성환 기자] #1. 지난해 8월 A씨는 고가(高價)의 ‘랜드로버 디스커버리4’ 차량을 구입했지만 구입 2주 만에 차량 하부 부식을 발견했다. 단순 표면에 녹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부품 일부 전체가 시뻘겋다. A씨는 해당 부품 또는 차량 교환을 요구했지만 업체는 거부했고 소송까지 갔다. 현재까지 진행 중인 소송에서 판사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소비자를 보호하는 규정이나 법이 약하고 차량 교환·환불 판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비자에게 하부부식이 중대결함인 이유를 증명하라고 말했다. 자동차 전문가가 아닌 A씨는 이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고민이다.

#2. 지난 5월 B씨는 ‘벤츠 E220 블루텍’ 차량을 구입한지 2개월 만에 급발진 현상을 겪었다. 가족 여행 중에 아찔한 경험을 한 B씨는 벤츠사의 서비스센터 직원을 호출했고, 서비스센터 직원이 차량을 함께 탄 상황에서도 급발진은 또 발생했다. 당시 차량은 입고됐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고 차량을 판매한 영업사원은 연락이 쉽게 닿질 않았다. 서비스센터는 차량 정비 시 발생되는 훼손은 소비자에게 있다는 면책동의서에 사인까지 요구했다.

#3. 이달 초 C씨는 ‘현대·기아차의 니로 하이브리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구입했다. 하지만 몇 주도 안 돼 차량의 엔진 경고등에 불이 자주 들어왔다. 불안한 C씨는 정비소에 차량을 여러 차례 맡긴 결과 차량 시동 등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인젝터 불량’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중대한 안전 결함일 수도 있어서 리콜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업체는 문제 제기를 하는 일부 소비자만 조용히 고쳐주는 데 그치고 있는 모양새다.

본지가 직접 제보를 받아 취재하거나 자동차칼럼에서 밝힌 실제 사례들만 일부 모아봐도 이처럼 많다. 소비자의 잘못으로 인한 것도 아니고, 차량의 결함인데도 결함의 내용과 중대한 결함 여부를 소비자가 입증해야 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수천만원의 구입비가 들어가고 안전과 직결될 수 있는 데도 자동차 결함 관련 교환·환불은 쉽지가 않다. 폭스바겐이 배출가스 조작 사태를 일으키고도 소비자 보호법이 강한 미국과는 달리 보상은 물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모습도 국내 소비자보호 기능이 비정상적임을 증명한다.

이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자동차 교환·환불 기준 완화’ 등을 골자로 한 ‘소비자분쟁기준 개정안’을 28일부터 행정예고 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 개정안은 자동차 업체들이 교환·환불을 거절해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아직 없어 법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제대로 실효성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는 같은 부위에 시동꺼짐 등 중대결함이 4번 이상 발생했을 경우만 신차의 교환·환불이 가능했다. 이는 안전에 위협이 돼도 4번이나 이를 감수해야 한다는 소비자의 불만사항이었고, 자동차 업체들에겐 차량 교환 등 소비자의 요구를 피하는 데 활용돼 왔다.

공정위의 새로운 개정안은 신차 교환·환불 가능 조건을 결함 3회 발생(2회 수리 후 재발) 시로 수정될 예정이다. 사고 가능성이 낮지만 수리가 필요한 ‘일반결함’도 4회 하자 시 교환·환불이 가능토록 했다.

교환·환불 기간의 기준도 바뀐다. 기존에는 차량의 신규 등록일이나 제작 연도의 말일인 ‘차령기산일’에서 소비자가 실제로 차량을 사용하기 시작한 ‘차량인도일’로 수정한다. 만약 등록시기가 올해 1월인 차를 올해 6월에 구매했다면, 기존에는 내년 1월까지만 교환·환불이 가능하던 것을 내년 6월까지 가능해진 것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번 개정안 내용은 미국의 소위 ‘레몬법(결함차량 매수인보호법)’을 참고한 것이다. 캘리포니아주 등은 중대 결함이 2회 발생했을 때 신차를 교환·환불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를 어긴 자동차 업체에는 ‘징벌적 배상’ 등 불이익을 주고 있다.

이번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미국의 소비자를 위한 레몬법을 참고하고, 30년 만에 규정을 개정하는 것이어서 한 걸음 진보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법적인 강제성이 없어 실제로 소비자가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현재 국회에 발의된 ‘자동차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거나, 기존의 소비자 관련 규정이 미국의 ‘징벌적 배상 제도’와 같은 법적인 강제성이 필요해 보인다.

▲ 지난해 5월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에서 디스커버리4 차량을 구입한 박모씨는 새 차를 구입한 지 2주가 되던 날 우연히 차량 하부의 부식을 발견했다. 박씨는 업체에 부품의 교환을 요구했지만 업체는 이를 거부했고 박씨는 이와 관련해 소송을 진행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일부 부품이 구입한 지 2주밖에 안됐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시뻘겋게 녹슨 모습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DB

◆전문가들 ‘컨트롤타워·징벌제’ 누차 강조

지난해부터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됐던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과 관련해 국내에서는 미국에서처럼 잘못을 시인하거나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한국의 소비자 규정이나 법이 약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여러 차례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과 같은 자동차·교통 관련 컨트롤 타워를 두고 자동차 관련 사고에 대한 전문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하고, 결함이 의심되는 경우 교환·환불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또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징벌적 배상’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동차급발진연구회 회장으로 있는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벤츠의 급발진 문제와 관련해 “벤츠의 급발진 문제와 소비자 대응 문제는 이번만이 아니다”라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판매 시장이 한국인데도, 차만 팔면 끝이라는 식의 업체들의 관행적 태도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김 교수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발생한 손해에 대한 제조업자 등의 손해배상 책임을 규정하는 ‘제조물책임법’이라는 게 있지만 실질적으로 소비자의 피해가 규명되거나 차량의 교환·환불 등을 받은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비자보호 분야에 정통한 김종훈 한국자동차품질연합 대표는 본지 ‘자동차칼럼’을 통해 “자동차 관련 민사소송 사례 중에서 차량 문제의 입증책임이 원고인 소비자에게 있다고 재판부가 판결해 비전문가인 소비자는 결함을 증명하지 못하고 패소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소비자는 자동차회사나 판매회사보다 전문성이 절대적으로 떨어진다”면서 “앞으로는 미국처럼 급발진을 포함한 자동차 결함 의심 사고 등의 입증 책임을 자동차회사가 지도록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자동차 회사는 문제제기 차량에 대해서 전문가 입장에서 소비자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고, 문제가 있는 차량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공정위의 ‘소비자분쟁기준 개정안’에는 캠핑장에도 숙박업 분쟁 기준을 적용하고, 업소가 거짓·과장광고를 한 경우 계약금을 환급하도록 하는 규정도 포함됐다. 불량 타이어 환급은 기존엔 타이어 구입가에서 부가가치세를 뺀 금액을 기준으로 했으나, 개정안은 부가세를 포함한 가격을 기준으로 삼도록 했다.

전자카드, 온라인·모바일 상품권에 대한 분쟁해결기준도 새로 마련된다. 상품권을 구입하고 7일 이내에는 구입 철회 시 전액 환불을 받을 수 있다. 또 TV와 냉장고, 세탁기 등 분쟁이 많은 전자제품의 부품 보유기간을 1년 더 늘린다. 전자기기 부품에 대한 생산자의 부품보유기간도 제품의 ‘생산중단 시점’에서 ‘제조일자’로 바뀐다. 개정안은 다음달 17일까지 의견수렴과 검토 절차를 거친 뒤 전원회의 의결을 거쳐 시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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