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종가’ 종부 김인순씨
‘옛 문서’ 그늘에 말리며 보관
2000년 장서각에 문서 맡겨
하루에 2번씩 찾아가 살피던 
시아버지 발걸음 점점 줄어

‘오리종가’ 종부 함금자씨
다락서 찾은 옛 서책·한지 뭉치
“남편 집안 것 함부로 할 수 없어”

분홍 보자기 싸서 소중히 보관
이사 때도 가슴에 품고 다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왕조실록’만큼 중요한 문서들이 있다. 명가(名家)의 ‘고문헌’이다. 왕실 문서를 통해 조정에서의 일을 알 수 있다면, 수백 년간 대대로 이어져 온 명가 고문헌에는 백성의 삶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고문헌을 명가의 안주인들은 생명처럼 지켜왔다. 낡고 오래된 문서들을 누구보다 아꼈던 안주인들의 삶과 마음은 어땠을까.

▲ ‘서계종가’ 종부 김인순씨 ⓒ천지일보(뉴스천지)

◆‘서계종가’ 종부 김인순씨

‘서계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종택’의 12대 종부 김인순씨는 지난 1980년도에 서계종가에 시집왔다.

“겨울이 지나 시아버님이 다락에서 뭘 잔뜩 꺼내셨어요. 먼지가 잔뜩 쌓인 낡고 오래된 고문서였어요.” 난생처음 보는 오래된 책, 문서들.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을 만큼 양이 많았다.

“아가, 이 자료들을 잘 말려서 지켜야 한다.” 시아버지는 김씨에게 신신당부했다.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귀해 보여 김씨는 애지중지하며 날마다 그늘에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종가다 보니 제사도 있고, 마당의 풀도 뽑아야 하고 농사도 지어야 했다. 문서를 더 꼼꼼히 관리하고 싶었지만, 시간을 내는 게 가끔은 어렵기도 했다. 그러다 한국학 전문도서관인 ‘장서각’ 소식을 듣게 된다.

“아버님, 장서각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다락에서 찾은 문서들이 어떤 문서인지 알려주고 더 깨끗하게 보관해 준대요.” 하지만 그 당시 시아버지는 들은 체 만 체했다고 한다. 그러다 2000년에 장서각에 고문서들을 맡기게 된다.

“(고문서를 맡긴 이후) 아버님이 자꾸 없어지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의정부에서 전철을 타고 하루에 두 번씩 장서각에 가셨던 거예요. 집안 문서들이 잘 있나 보시려고요.”

장서각에서 전시도 열리고, 문서도 깨끗이 보관되는 걸 보고 나니 그제야 장서각에 가는 발걸음이 줄었다고 한다.

“중요한 문화유산을 집안에서 간직하고 있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문화유산을 접했으면 좋겠어요.”

▲ ‘오리종가’ 종부 함금자씨 ⓒ천지일보(뉴스천지)

◆‘오리종가’ 종부 함금자씨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종택’ 종부 함금자씨도 조상의 고문서를 소중히 지켰다. 함씨는 1964년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만난 종갓집 4대 독자인 종손과 결혼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도 1시간가량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종가. 그곳에서 함씨는 신혼생활을 했다.

“가문의 전통과 옛 법, 종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게 쉽지는 않았죠. 제사를 치를 때도 한 달 전부터 꼼꼼히 준비해야 했어요.”

갓 시집온 종부인 함씨는 종가의 안주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느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게 뭐지?” 다락을 치우다가 오래된 상자를 본다. “상자를 열어보니 글이 적힌 한지 뭉치가 가득했어요. 안방 벽장에는 몇 권의 고서들이 있었죠.”

거무스름한 낡은 오동나무 상자도 있었는데, 귀해 보이는 오래된 책도 담겨 있었다. 그 당시 “한국 전쟁 때문에 선조의 유품이 거의 남지 않았을 거다”라는 말을 주위에서 듣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다락이며, 집안 곳곳에서 오래된 물건이 나왔어요. 뭔지는 몰라도 남편의 집안에 관한 것이어서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어요.”

오히려 귀하게 보관해야겠다는 확신에 찼다. 그래서 친정어머니에게 주머니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분홍 주머니에 글이 적힌 한지 뭉치와 자료들을 넣어 가슴에 꼭 껴안고 이사를 다녔다.

시간이 흘러 1980년대. 농경사회는 없어지고 점점 현대화되기 시작했다. 주위의 논밭도 다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다 보니 묘 보존 관리, 종가관리 등을 놓고 종가는 비상이 걸린다. ‘종가를 잘 보존해서 후세에 물려줄 것인가, 현실에 맞게 없앨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던 것.

하지만 ‘오리 이원익 선생’이 후세에 존경받을 역사적 인물이라는 생각이 더욱 컸다고 한다. 그래서 유적지를 보존키로 결정했다. 이후 소중히 간직했던 고문서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고문서들은 2003년 개관한 ‘충현박물관’에 전시됐다.

“조상의 업적과 삶을 널리 알리고, 충효 사상도 시민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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