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꼭두 신새벽에 일어났다. 여름이면 동이 일찍 터서 그런지 잠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다. 어쩌다 눈이 일찍 떠진 새벽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서재 책상에 앉아있노라면 잠이 덜 깬 상태임에도 오히려 정신이 맑아져온다. 어둠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사물이 열리는 이때부터는 바깥 정원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 지저귐 소리마저 필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아직은 사위가 조용한 신새벽이라 아름다운 풍광들이 펼쳐지고 있다.

‘신새벽’은 날이 새기 시작하는 새벽이다. 날이 새로 밝아지는 아주 이른 새벽 때를 일컫는바 ‘첫새벽’의 잘못된 표현이긴 하지만 글을 쓰면서, 특히 시에서 첫새벽이라는 용어보다는 신새벽을 더 자주 볼 수가 있다. 필자가 과거 시를 쓸 때에도 굳이 ‘신새벽’이라 쓰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대표적 서정시인 중 한분인 박재삼 시인(1933~1997)의 시 내용 ‘… 진주 남강 맑다 해도 오명가명 신새벽이나 달빛에 보는 것을…’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또 김지하 시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에도 신새벽이 나온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중략)’ 사실 신새벽은 ‘새벽’에 한자 ‘신(新)’을 넣어 표현한 것으로 순수한글에 한자를 앞에 붙인 게 어울리진 않지만 이상하게도 신새벽이 주는 뉘앙스는 첫새벽보다는 강하다.

그건 그렇고 첫새벽에 날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변하는 바깥 풍경과 함께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상념도 하며 글 쓰는 이 순간이 정말 편안하다. 다음 주 원고를 써야 하는 쫓기는 시간 속에서도 차차 엷어져가는 어둠의 빛깔을 마주하는 새벽녘, 이런저런 생각이 많지만 때로는 눈 감고 명상하다보면 좋은 소재들이 떠오르게 된다. 온갖 잡상들이 필름 영상처럼 흘러가는데, 어저께 고향 선배가 들려준 정년퇴직 후 부부가 갖는 갈등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는 요즘처럼 황혼이혼이 늘어가는 세태에서는 누구든 늙어갈수록 부인과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성장한 자녀들도 제 엄마 편을 드니 가장의 입지가 좁아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식탁 대화 스타일로 식사시간에 집사람과 주로 대화한다. 최근에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 중 하나는 중국 자유여행을 다녀온 부부 이야기다. 중국어를 배우러 중국문화원에 나가고 있는 아내가 그곳에서 함께 공부하는 김(金) 선생 부부가 얼마 전에 중국 자유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여행 전부터 여러 가지 내용을 익히 들은 터라 중국을 다녀온 후에도 김 선생의 현지 에피소드 등을 듣고서 공감하는 내용이 많았다.김 선생은 퇴직 후 대학원 중국어 과정을 마쳤고 그동안 여러 번 중국여행을 했지만 자유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김 선생의 여행 후일담으로 이번 여행과정에서 드러난 중국어 실력으로 부인한테 체면이 구겨졌다는 것이다. 장기간 중국어를 배웠어도 현지인들과 원활한 소통은 어렵다. 간단한 대화는 문제없다고 해도 지역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자유여행이 불편하게 마련인데, 용케도 첫 자유여행을 부인과 함께 잘 다녀왔다니 일단 성공한 셈이다. 특히 충칭(重庆)~이창(宜昌) 간 유람선 여행을 마친 뒤 은쓰(恩施)시에서 충칭으로 돌아가는 길에 중국여성과 동행하게 됐는데 얼마나 친절한지 충칭의 숙소까지 김 선생 부부를 안내해주어 고마웠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필자도 부부동행으로 중국 자유여행을 하면서 그런 경험을 했는바, 낯선 도시에 도착해 우리가 찾는 숙소 위치를 행인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응대해주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충칭, 양저우, 뤄양(洛阳)에서도 그랬다. 심지어 숙소까지 직접 안내해주는 사람도 있었으니 김 선생이 중국인들의 친절에 감사했다는 말에 동감이 가고도 남는다.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은 한류 열풍 영향이 매우 크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중국인 가운데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가진 자가 35.3%인데 비해 한국에 호감을 가지는 자들이 65.8%라는 통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처럼 한·중 간 우호관계가 좋은 지금, 사드 한국 배치 문제로 국내외가 시끄럽고 중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울 조짐이 보인다. 정부 인사들은 중국의 대한(對韓) 경제적 보복 조치는 없다고 호언하지만 잘 해결되기를 바랄뿐이다. 첫새벽에 일어나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여기까지 글 쓰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환하게 밝았다. 시공이 아름답게 머무는 이 시간에 불현듯 ‘아직 신새벽 초장이고 신총 갓심 내놨다’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것은 웬일인가. ‘이제 시작한다’는 뜻의 이 말을 필자가 새기는 것은 새벽이 모든 어둠을 서서히 헤쳐 내는 지혜의 샘인 것처럼 사드 배치문제의 국내외 갈등도 순조롭게 해결됐으면 하는 바람이 더욱 커서다. 이 아침에 맞이하는 좋은 현상들은 분명 새벽이 내게 가져다준 선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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