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꽃이 필 때

최영철(1956~  )

첫사랑의 정체는 소매치기였어
말 한마디 없이
나와 너의 순정만 훔쳐 달아났지
나 잠깐 혼절해 있는 사이
그걸 어디 멀리 내다버리러 간 줄 알았는데
이순 어느 맑은 날
저쯤 수줍음 그대로 돌아와 있네

 

[시평]

‘첫사랑’, 그 누구에나 아련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첫사랑은 흔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련한 추억만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리라. 왜 첫사랑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는가. 첫사랑은 처음이기 때문에 서툴러서 그런 것인가. 그래서 결혼이라는 어쩌면 더 많은 것이 요구되는, 그러한 관문으로 들어서기에 너무 많은 것이 부족하고 서툴러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첫사랑은 그 누구에게나 가장 순수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순수하였기 때문에 ‘첫사랑’은 그 정체가 ‘소매치기’마냥,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순정만을 훔쳐 달아난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 첫사랑을 잃어버린 충격으로 잠시, 잠시 혼절을 한 그 사이. 그 첫사랑은 내가 모르는 어디 멀리로 내다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다, 아니다. 나이 이제 이순(耳順), 서서히 노경으로 접어드는 어느 길목, 그 ‘첫사랑’ 수줍음은 그대로 아직 나에게 남아 있었구나. 그 첫사랑, 그렇게 나에서 떠나간 것이 아닌, 내가 모르는 어느 곳에서 나를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구나. 나리꽃이 필 무렵, 처음 만났던 그 첫사랑. 그 예의 수줍음 그대로 지닌 채, 저쯤 나를 향해 미소 짓고, 그렇게 서 있었구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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