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말이 중국과 서로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세종실록 中 - 

 

▲ 의녀들이 왕실에서 동의보감을 습득하고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언해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의보감내경편언해(東醫寶鑑內景篇諺解)’(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전기, 백성 의원 이용 못해
약재 옆에 있어도 사용법 몰라
한글 창제… 까막눈서 눈 ‘번쩍’

한글 의서 시골까지 빠르게 보급
전염병·출산·식품 등 다방면
가정상비약 구비… 多목숨 살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돌림병이다!”

1524년(중종 19) 가을 황해도 지방에 돌림병인 여역(癘疫, 전염성 열병)이 돌기 시작했다. 돌림병은 이듬해 봄까지 이어져 숱한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황해도 지방은 한순간에 쑥대밭이 됐다.

중종은 의원에게 명해 온역(溫疫)을 치료할 처방전을 모았다. 그리고 의서인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만들었다. 한글로도 함께 풀어 적었다. 덕분에 외진 시골에서도 언해본을 통해 필요한 약재를 구할 수 있었다. 처방받은 약재 덕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다.

▲ 허준이 펴낸 동의보감.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까막눈 백성, 눈뜨다

조선 전기, 가난한 백성들은 의원을 이용하지 못했다. 어쩌다 의서가 손에 들어와도 까막눈 탓에 한문을 읽지 못했다. 약재를 바로 옆에 두고도 사용법을 몰라 생명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다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됐다. 그리고 한글로 번역된 의서가 나왔다. 한글은 백성에게 그야말로 ‘안약’ 같은 존재였다. ‘까만 건 글자요, 하얀 건 종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기 시작했다. 한글로 된 의서는 빠르게 보급됐다. 전염병은 물론 출산, 식품 등 다양한 분야의 한글 의서가 나왔다. 침·뜸을 통한 치료법도 백성이 쉽게 익힐 수 있었다.

▲ 윤호 등이 편찬한 ‘구급간이방언해’ (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백성, 약초 알도록 하라”

선조는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토록 했다. 당시 선조는 “외진 시골에는 의약이 없어 일찍 죽는 자가 많다. 우리나라에는 향약(鄕藥, 시골서 나는 약재)이 많이 생산되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그대는 약초를 분류하면서 향명(鄕名)을 함께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허준에게 명했다.

윤호(尹壕) 등은 성종의 명을 받고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를 편찬했다. 이 의서는 구급방서로서 가장 완비된 것이다. 질병을 중풍·두통 등 127종으로 나눠 그 치료 방문(약을 짓기 위해 약 이름과 약의 분량을 적은 종이)을 모아 엮었다. 시골에서도 이 의서만 있으면 치료할 수 있도록 방문마다 한글로 언해해 덧붙여 놓았다.

‘가정상비약’도 구비할 수 있게 됐다. ‘언해납약증치방(諺解臘藥症治方)’ 덕분이다. 이 의서는 매년 납월(臘月, 12월)에 내의원에서 그해에 수용될 각종 상비약방을 기록한 건데, 납월에 조제하므로 납약이라 불렀다. 이 의서에는 납약의 증상에 따른 사용방법과 복용 시 피해야 하는 내용이 담겼다.

매년 납일에 내의원에서 환약(청심원, 소합원)을 제조해 올리면,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비약의 용도로 하사했다. 특히 한문 뒤에 언해문을 함께 적었다. 다급한 상황에 여인들이 납약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 가정상비약을 소개해 놓은 ‘언해납약증치방’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여인 위해 풀어쓴 의서

여인을 위한 의서도 빠르게 보급됐다. ‘해산달엔 굳은 밥과 차진 병식과 마른 병식과 마른 육포·어물, 기름진 것과 소화하기 어려운 것은 드시지 마시고…(생략).’

이는 ‘임산예지법(臨産豫知法)’의 내용이다. 임신한 여인이 출산 전후 숙지해야 할 내용이 담겼다. 이 의서는 왕실 여성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산에 앞서 미리 알아야 할 여러 사항이 담겨 있다. 해산 후 몸가짐, 태독 제거법, 탯줄 자르는 법, 수유법, 목욕법, 갓난아이를 보호하는 법 등 출산 전후의 단계별 지침이 담겨있다.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산부인과 계열의 의학서인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도 있다. 주로 잉태·출산·유아 보호 등 처방법과 치료법이 담겨있다. 기존까지는 한문으로 쓰인 의서가 대부분이어서 부녀자가 보기에는 어려웠다.

‘동의보감내경편언해(東醫寶鑑內景篇諺解)’는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의 내경편을 언해해 필사한 책이다. 이 의서는 종이나 장정으로 보아 일반 백성보다는 의녀들이 왕실에서 동의보감을 습득하고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언해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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