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을 외친 자들의 처형터 ‘서소문밖’
자유와 평등을 외친 자들의 처형터 ‘서소문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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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성당의 순교자 전시회 작품 중 하나. 조선 후기 박해받던 천주교인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DB

[천지일보=박완희·차은경 인턴기자] 사소문 중 하나인 서소문은 어떤 곳일까.

소의문(昭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쪽의 소문이었다. 특히 서소문밖은 조선후기 사회의 부정부패와 탄압, 신분차별로 인한 자유·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혁명운동 등을 일으키며 항거한 이들의 처형지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상공업 인구 증가와 경제력 향상으로 힘이 커진 서민들은 이해와 권익을 지키려는 갖은 형태의 민란을 일으켰다. 이때 서소문밖은 사람들이 붐비던 곳으로 칠패·아현시장 등 거대 상업지역이 형성돼 있었다.

1416년(태종 16년) 풍수지리적으로 숙살지기(肅殺之氣)가 있다는 설에 따라 서소문밖은 국사범(國事犯)으로 지목된 이들의 대표적인 처형지로 사용됐다. 국사범에는 조정의 부정부패와 탄압, 신분차별로 인해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민란을 일으켜 항거한 이들도 포함됐다. 그 대표적인 민란이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혁명운동 등이다. 숭례문 인근에 위치해 번화가였던 서소문밖 네거리는 조정에서 민중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이곳에 죄수를 효수(梟首: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던 형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명지전문대 최길순 교수는 저술 ‘조선시대 서소문지역 민중사 전개과정’을 통해 1894년 정월 고부봉기로부터 3월 무장기포 백산봉기, 전주성함락, 관·일본군 민보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대학살 등으로 10만여명의 동학농민군이 희생당할 당시 서소문에 동학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머리가 효수됐고, 최시형 교조는 순교 직전 1달여간 이곳에서 온갖 고문․재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 서소문지역은 천주교에서도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등으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 당한 곳으로 유명하다. 신유박해 때에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많은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들이 처형․유배됐다. 1866년 조선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평신도 홍봉주가 체포되면서 시작된 한국 천주교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 때에는 1866~1871년에 걸쳐 8000~1만명의 순교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서소문지역은 순교자들 중 44명이 성인으로 선포됐고, 지도자나 회장의 처형이 많아 한국 천주교에서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조선 후기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됐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위협이 됐기 때문에 정부는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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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 2016-07-06 02:16:06
그리고 보면 참 잔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