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자각을 중심으로 진입공간, 제향공간, 성역공간 등 3단계의 공간으로 나뉘는 조선왕릉(왼쪽). 거리에 따라 건물이 다르게 보이게 설계하는 명청황릉. 멀리서 보면 건물들이 하나의 건물로 보인다.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무덤 주인따라 능·원·묘로 불러
사대문 밖 100리 안에 능역 만들어

명청황릉
한 곳에 집중 조성… 수십년간 지어
보는 위치·거리 따라 다르게 보여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상례(喪禮)는 신중히 하고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은 두터운 데로 돌아간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효’에 대한 공자의 말이다. 상례는 효를 실천할 때 가장 신중히 치러야 하는 의례였다.

‘조선왕릉’도 효를 실천하려는 국왕들이 선대 국왕과 왕비의 시신을 예법에 맞게 장사지낸 결과물이었다. 또한 조선왕릉은 1392년 조선 건국 이래 518년을 이어온 당대의 역사와, 문화,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긴 조선왕조 문화의 결정체다.

조선왕릉은 지난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당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5분’. 세계인도 그 우수성을 한눈에 알아봤다. 논란이 이는 문화유산은 3시간 이상 심의가 이어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15분은 매우 파격적인 숫자다.

세계인도 인정하는 조선왕릉, 과연 어떤 특징이 있을까. ‘명청황릉’과는 어떤 점이 다른 걸까.

▲ 조선왕릉 전경(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능호’ 어땠나

조선시대 왕실과 관련된 무덤은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된다. 왕릉으로 불리는 능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친족 등의 무덤’을 말한다. 기타 무덤은 묘라고 불렀다.

반면 명(明)대에는 오직 황제가 묻힌 능에만 능호를 부여했다. 청(淸)대에 이르러 황제 황후의 능묘와 황제의 비빈, 황족의 묘장을 ‘원침(園寢)’이라 불렀다. 직관, 서민의 것은 ‘묘’라고 불렀다.

◆‘능’ 언제 지었나

조선시대 왕릉과 원(園)은 일반적으로 당시의 도읍지인 서울 한양에서 10리(약 4㎞) 밖 100리(약 40㎞) 안에 조영했다.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 있는 ‘능역은 한양성 사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규정을 지킨 것이다.

42기의 조선왕릉 가운데 북한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이 같은 조선왕릉은 대다수가 왕이 죽은 후 땅을 선별해 지어졌다.

반면 명청시대의 황릉은 한 구역에 집중돼 능구를 이루고 있다. 예컨대 중국 북경 천수산(千壽山) 아래에 조성된 명십삼릉(明十三陵)은 명나라 황제들의 집단능묘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의 장릉(長陵)을 중심으로, 총 13명의 황제가 잠들어 있다.

명청시대에는 명태조 주원장부터 여러 황제들이 생전에 땅을 선별해 수릉을 미리 지었다. 방대한 공정 탓에 십수년의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능명(陵名)은 황제의 사후에 지어졌다.

▲ 명청황릉 전경.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 이용한 공간 활용

조선왕릉은 풍수지리에 따라 배산임수와 풍경이 좋은 곳을 선별했다.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조선왕릉은 신성한 영역으로 주변의 시설과 격리했다. 특히 조선왕릉은 건축물과 풍광이 어우러지는 ‘통합된 시계(視界) 구조’를 갖고 있다.

조선시대 능역의 공간구성은 제향 시 사자(死者)와 생자(生者)와의 만남의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3단계의 공간으로 나뉜다. 참배객을 위한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재실, 지당, 금천교 등), 제향공간(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등), 사자의 공간인 성역공간 등이다.

최근 열린 ‘조선왕릉과 동아시아 황릉’ 국제심포지엄에서 발제한 이창환 상지영서대학교 교수는 “성역공간과 제향공간에서 많은 지면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계층적 의미를 둔 것”이라며 “무덤을 한층 높여 시계를 확보하도록 했으며, 특히 정자각과 무덤의 높이 차이를 크게 했다”고 설명했다.

명청황릉은 건축물 배치에 반드시 자연환경을 중심에 뒀다. 인위적인 아름다움과 자연미의 조화를 강조했다.

중국 황릉 전문가 왕치흥 중국 천진대학교 교수는 “한나라 이전에는 능을 흙으로 쌓아서 산처럼 만들었는데, 이후에는 산에 지하도를 뚫어서 산 전체를 무덤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위진남북조시대, 특히 동진(東晉) 때부터는 산을 배경으로 하는 방식을 썼으며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왔다”며 “풍수지리를 통한 장지의 선별도 체계적으로 바뀌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거리에 따라 건물이 다르게 보이는 설계방식은 서양에도 없는 명청황릉의 특징이다. 예컨대 멀리 있을 때는 건물이 뭉쳐서 하나의 건물로 보이는 데, 일정한 거리가 되면 그제야 건물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건축물 뒤에는 반드시 산이 있다.

◆“문화유산 체계적 보존대책 필요”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따른 과제는 남아있다. 이 교수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문화국가로서의 위상 증진과 국민의 자부심 고취, 국가와 지역 경제적 효과, 문화유산의 체계적 관리와 보존의 책무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또 세계문화유산에서 제외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확인·연구해 추가 등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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