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 함정에 빠진 韓경제
수신금리 내려도 예금·적금↑
단기부동자금 945조원 돌파
제조업 총투자율 6년來 최저
부동산 들썩… 버블 우려도

[천지일보=임태경 기자] 정부가 ‘저성장 병’에 걸린 한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긴급 처방을 잇달아 내놓았다. 처방 약은 돈이다. 돈을 풀어 가계소비와 기업투자를 늘리고 꺼진 경제 불씨를 되살리겠다는 의도이다.

1차 처방은 일자리 대책이다. 청년실업률은 올해 2월부터 매월 당월 기준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이에 정부는 15조 8000억원을 수혈해 일자리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2차 처방은 기준금리 인하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1.25%로 내리면서 경기부양 구원병으로 나섰다. 물가를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금리 시대를 연 것이다. 3차 처방은 ‘20조원+α’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이다. 그동안 정부는 외부 압박에도 추경편성을 부인해 왔다. 그러다 지난 15일 통계청에서 5월 고용지표를 발표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인한 대외경제 불확실성과 구조조정 후폭풍으로 대량 실업난이 예고되자 정부는 입장을 선회했다.

문제는 시장에 아무리 유동성을 공급해도 정부 생각만큼 돈이 돌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돈은 혈액과 같다. 피가 돌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듯이, 돈이 필요한 데로 흘러가지 않으면 경제는 살아날 수 없다. 유동성을 시중에 확대 공급하면 이론상 돈의 조달이 쉬워져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가 늘어나고 경제는 활기를 띠게 된다. 투자와 소비가 증가하면 생산과 고용이 늘어나고 이는 다시 소비와 투자를 활성화시켜 경제 전체가 선순환을 그린다. 그러나 시중에 돈이 남아돌아도 미래가 불확실하다면 가계는 지갑을 닫고 기업은 투자를 꺼리게 된다. ‘돈맥경화’ 현상, 곧 ‘유동성 함정’은 시장에 현금이 흘러넘쳐 구하기 쉬운데도 기업의 생산, 투자와 가계의 소비가 늘지 않아 경기가 나아지지 않고 마치 경제가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말한다. 풀린 돈이 흘러갈 곳을 찾지 못해 금융시장을 떠도는 ‘유동성 함정’의 그림자가 우리 경제에 드리우고 있다.

 

◆은행에 쌓여만 가는 돈

시중에 풀린 돈이 경기위축으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채 쌓여 만 가고 있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이후 주요 은행들도 잇달아 수신 금리를 내렸지만, 예·적금 등에 돈이 몰리고 있다.

2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예금은행의 만기 1년 미만 정기예금 잔액(말잔 기준)은 4월 말 현재 199조 4830억원으로 역대 최대 수준에 육박했다. 단기부동자금도 올해 1분기 15조원 가까이 늘어나며 945조원을 돌파했다. 단기부동자금은 현금을 포함해 금융사에 맡긴 1년 미만의 수신성 자금을 모두 합한 것이다. 이 중 시중에 풀린 현금은 사상 최대인 79조 8900억원에 달한다. 언제든지 투자처를 찾아 옮길 수 있는 요구불 예금은 184조 6140억원, 수시입출식 저축성 예금은 451조 6600억원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저금리가 지속되면서 갈 곳을 찾지 못한 시중 여유자금이 안전하면서도 만기가 짧은 금융상품에 몰리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자금의 조달이 쉬워진 기업도 투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1분기 국내 총투자율은 27.4%를 기록하면서 6년 9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업이 투자를 꺼리면서 지난해 말 기준 국내 기업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497조원에 달했다. 기업에서 가계, 가계에서 기업으로 돈이 돌아야 하는 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꽉 막힌 것이다.

LG경제연구원은 ‘한국 기업의 활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보고서에서 “전반적인 기업활동이 부진한 상황에서 신생기업들도 많이 출현하지 못하고 있어 향후 우리 기업의 성장성이 빠르게 회복되기는 어려워 보인다”며 “성장성과 수익성이 낮은 기업이 여전히 퇴출되지 않고 새로운 신생기업이 성장하지 못하면 경제 전체의 자원배분 효율성이 낮아져 경기회복이 더욱 늦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시중에 돈을 풀어도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한국 경제의 활력을 잃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증시·부동산으로 몰리는 돈

더 큰 문제는 시중에 넘쳐나는 돈이 생산현장에 투입되지 않고 증시와 부동산으로 몰려들어 버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브렉시트 영향에도 시중의 뭉칫돈이 증권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 한국거래소와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7일 기준 고객예탁금 잔액은 26조 1809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7월 20일 기록한 종전 사상 최대치 기록을 무려 1조 5000억원가량 뛰어넘었다. 고객예탁금은 투자자가 주식을 사려고 증권사에 일시적으로 맡겨놓은 돈으로 언제든 증시에 투입될 수 있는 대기성 자금으로 분류된다. 주식거래활동계좌수도 올해 들어 100만개 넘게 증가해 지난 17 기준 2247만 3849개에 달했다.

부동산 시장은 이미 과열 영상을 보이고 있다. 서울 강남지역 재건축 가격은 지난 5월과 6월 사이 1억원 이상 뛰었다. 재건축 단지의 영향으로 5년 만에 강남구 아파트 매매가가 3.3㎡당 3300만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6월 넷째 주 서울 아파트 매매가는 재건축아파트 0.52%, 일반아파트 0.13%의 변동률을 기록하며 지난주 대비 0.19% 올랐다. 이는 2006년 12월 이후 10년 만에 최고 상승률이다. 초저금리 기조 속에 시중 유동자금이 한강 이남 일반 아파트로 옮겨가면서 서울 매매가격 상승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브렉시트로 하반기에 기준금리 추가 인하 가능성도 예상된다”며 “초저금리가 지속되면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부동산 시장에 투자금이 더욱 몰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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