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구한말에 천석꾼 만석꾼들이 대거 등장했다.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물결이 스며들면서 누구나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조상 대대로 부를 물려받은 양반지주들도 있었지만, 아무런 배경 없이 졸지에 만석꾼이 된 이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지방의 향리나 감영의 방자 출신, 지주의 마름 혹은 장사꾼들도 있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시절을 잘 만나 돈벼락을 맞은 신흥부자들이었다. 

이 시절 만석꾼들은 자린고비로 알뜰살뜰 돈을 모으기보다는 대개는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를 했다. 권력을 이용해 논밭을 갈취하거나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끌어 모았다. 재테크에도 재주를 보여 상업이나 금융, 제조업과 정미 양조업 등에서 재미를 보았다. 만석꾼들은 자칭 의적이라는 도둑들에게 재산을 털리는 일이 잦아지자 일본군이 주둔해 치안상태가 좋다는 도시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당시 만석꾼들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권력과의 야합이었다. 총독부는 상납과 충성을 대가로 만석꾼들을 비호하고 특혜를 주었다. 만석꾼들은 총독부를 비롯해 끈끈한 정치 경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특권을 누렸다. 특히 도평의회 등 지방자치기구들에 속한 무리들은 만석꾼들의 정치 로비 대상 영순위였다. 만석꾼들은 혈족이나 자식들을 권력층으로 편입시키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만석꾼 집안에서는 늘 잡스러운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본 부인을 두고 여기저기 첩을 두면서 가계가 복잡해지고 재산싸움이 벌어지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 형제간에 멱살잡이를 하고 부자지간에, 부부간에도 험악한 꼴을 보였다. 신교육을 받은 자식과 부모 세대 간의 갈등도 컸다. 

해방이 되면서 그동안 억눌려 참고 살았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북쪽의 만석꾼들은 토지개혁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고, 남쪽에선 농지개혁과 한국전쟁, 화폐개혁 등으로 지주들의 위세가 예전만 못하게 됐다. 그럼에도 귀신같은 재주로 재산과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만석꾼들도 적지 않았다. 만석꾼 집안의 부와 배경을 밑천 삼아 판검사나 의사 교수 등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로 출세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제는 만석꾼 천석꾼이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대신 재벌이 생겨났고,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로 신분의 극단을 표현한다. 만석꾼이 총독부, 정치인, 권력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세상을 희롱했다는 게 백년 전 이야기다. 백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시절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다. 재벌과 정치인, 검찰 등 한통속이 된 그들에게서 풍겨오는 악취 때문에 국민들이 숨을 쉴 수가 없다. 우리는 지난 백년 동안 무엇을 해왔던 것일까.

‘삼대 가는 부자 없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일까. 천석꾼은 천 가지 근심이, 만석꾼은 만 가지 근심이 있다고 했다. 과연 그 말도 맞는 것일까.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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